귀로 먼저 읽는 책, 누구나 누리는 문학 ‘듣는 소설’

조은별 기자 2025. 6. 1.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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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콘서트 ‘첫 여름, 완주’
배우이자 출판사 대표인 박정민
작가 김금희와 ‘듣는 소설’ 제작
최양락의 찰진 충청도 사투리
염정아 등 배우들 말맛 살려줘
음성도서를 전제로 한 원고 구성
책을 듣는 순간 눈 감아도 그려져
서울 성동구 성수동 ‘LCDC 서울’에서 열린 북콘서트에서 출판사 ‘무제’ 대표인 배우 박정민(왼쪽)과 작가 김금희가 이야기하는 모습.

책은 세상을 바라보는 창문이다. 책이 들려주는 작가의 목소리를 따라 우리는 가보지 못한 곳을 상상하고, 만나본 적 없는 이의 마음을 들여다본다. 그렇다면 아예 처음부터 누군가가 읽어주면 어떨까. ‘듣는 소설’ 프로젝트는 이 질문에서 출발했다. 이야기를 소리로만 듣는 경험은 독자에게 또 다른 감각의 문을 열어줄지 모른다.

시각장애인이나 문해력이 낮은 이들이 알아듣기 쉽게 쓰인 이 소설을 살펴보고자 5월23일 서울 성동구 성수동 ‘LCDC 서울’에서 열린 북콘서트 현장을 찾았다. ‘듣는 소설’을 기획한 출판사 ‘무제’ 대표이자 배우인 박정민과 작가 김금희가 자리했고, 초청 관객 90여명이 좌석을 가득 채웠다. 무대 뒤로 여름빛을 머금은 식물이 바람에 흔들리고, ‘듣는 소설’을 위해 제작된 음악(OST)과 함께 박정민 대표가 진행을 시작했다.

비디오테이프 상자처럼 슬라이드 케이스에 책을 넣는 방식으로 제작된 ‘첫 여름, 완주’ 종이책.

‘듣는 소설’은 박 대표가 시각장애가 있는 아버지를 떠올리며 기획했다. 종이책이 오디오북으로 만들어지기까지 매번 기다려야 했던 아버지를 위해 오디오북을 먼저 출간해보기로 한 것이다. 박 대표는 특히 소설 속 ‘말맛’을 잘 살리는 김 작가에게 그 시작을 부탁했다. 김 작가는 소설 ‘첫 여름, 완주’를 집필하며 형식을 새롭게 바꿨다. 눈으로 읽기 쉬운 글보다 귀로 들었을 때 이해하기 편한 말로 대사를 쓰고, 지문(바탕글)에는 인물의 행동뿐 아니라 효과음·배경음악도 생생하게 설명했다. 김 작가는 “이미지가 아닌 소리로, 서술보다는 대화로 표현하려 했다”며 “작업을 하는 동안 나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진실된 상태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고 책에 소감을 밝히기도 했다.

‘첫 여름, 완주’는 빚을 지고 사라진 선배 ‘고수미’를 찾아 완주에 간 성우 ‘손열매’의 성장기다. 열매는 수수께끼 같은 청년 ‘어저귀’ 등 각양각색의 완주 사람들을 만나며, 이들과 나눈 온정으로 세상과 마주할 힘을 얻는다. 김 작가는 작품을 쓰기 전에 경험한 이야기도 전했다. 시각장애인과 함께 듣는 오디오북 독서모임에서 그는 참가자들이 발레·수상스키 등 ‘움직임’에 관심이 많다는 걸 느꼈다. 이 운동성을 소설 속에 깊이 녹여내는 데 집중했다. 김 작가는 “소설을 쓰면서 내가 할 수 있는 다양한 변주를 원 없이 시도해 기쁜 여름이었다”며 “이타적인 마음을 담아 개성 있는 목소리를 가진 인물들을 살리기 위해 힘썼다”고 말하며 북토크를 마무리했다.

불이 꺼지기 전의 전시장. 관객은 어둠 속에서 듣는 소설의 일부분을 감상할 수 있다.

특별한 전시도 함께 열렸다. 빛이 전혀 들지 않는 깜깜한 전시장에서 오로지 청각에 의지해 소설을 체험하는 방식이다. 향긋한 나무향이 감도는 공간에 들어서면 귀뚜라미 소리와 함께 소설 속 장면이 들리기 시작한다. 장면마다 알맞은 음악이 흐르고, 배우들이 ‘말맛’을 살려 표현한 대사가 공간을 채운다. 특히 손열매와 할아버지는 구수한 충청도 사투리를 사용하는데, 이때 할아버지는 ‘괜찮아유’라는 유행어가 인상적인 충청도 출신 개그맨 최양락이 맡았다. 이 외에도 고민시·염정아·김의성 등 10여명의 배우가 녹음에 참여했다. 주로 한사람이 낭독하는 오디오북과 달리 여러 인물이 녹음한 것이 특징이다.

기자와 함께 전시를 체험한 한 관람객은 “깜깜하던 눈앞에 소설 속 풍경이 환히 그려지는 듯했다”고 소감을 전했다. 박 대표는 “앞이 보이지 않는 곳에선 청각에 더 집중하게 된다”며 “이 전시가 각자의 방식으로 나만의 완주를 그려보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고 설명했다. 전시는 9일까지 이어진다.

북토크 후 진행한 서면 인터뷰에서 박 대표는 “오디오북 녹음을 할 땐 배우들이 해석한 인물을 지켜보며 그저 즐거울 따름이었다”며 “제가 공을 들인 것은 적재적소에 맞게 효과음을 넣는 일이었다”고 밝혔다. 이어 출간된 종이책도 남다르다. 비디오테이프 상자처럼 느껴지도록 슬라이드 케이스에 책을 넣는 방식으로 만들었다. 책이 나오고 가장 인상 깊었던 순간으론 “4월17일 국립장애인도서관에서 열린 북토크에서 큰 박수로 화답을 받고, 계속 진행해달라는 요청도 받은 것”이라며 “저에게 큰 용기가 됐다”고 전하기도 했다.

“아버지같이 눈이 불편한 분이 가장 먼저 책을 만날 수 있도록 ‘듣는 소설’을 만들었습니다. 그저 하나의 선물을 전하고자 시작한 것이라 거창한 표현들이 조심스럽습니다. 출판사 무제가 내건 슬로건 ‘소외된 것에 관하여’처럼 앞으로도 다양한 형태로 책을 만들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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