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오페라가 된 한국 '물귀신'… 낯설지만 사유하게 하는 동시대 창작물

2025. 6. 1. 13:00
음성재생 설정 이동 통신망에서 음성 재생 시 데이터 요금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글자 수 10,000자 초과 시 일부만 음성으로 제공합니다.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이지영의 클래식 노트]
예술의전당 창작 오페라 '더 라이징 월드: 물의 정령'
편집자주
20여 년간 공연 기획과 음악에 대한 글쓰기를 해 온 이지영 대원문화재단 전문위원이 클래식 음악 무대 옆에서의 경험과 무대 밑에서 느꼈던 감정을 독자 여러분에게 친구처럼 편안하게 전합니다.
오페라 '더 라이징 월드: 물의 정령'. 예술의전당 제공

예술의전당이 세계 시장을 겨냥해 영어로 만든 창작 오페라 '더 라이징 월드: 물의 정령'(이하 '물의 정령')이 31일 막을 내렸다. 물귀신과 물시계라는 전통 소재로 이야기를 엮어 현재와 과거를 상징하는 음악적 요소와 연출로 눈과 귀를 즐겁게 했다. 한국적 문화 코드도 혼종의 21세기에 이질감 없이 세련되게 어우러졌다. 한국어가 극중 '고대 언어'로 등장했고 물시계와 물항아리, 수묵화처럼 연출해낸 소나무 배경, 거문고 장인과 교향악의 합주, 코드 진행으로만 들리던 '아리랑'의 화성 등을 자연스럽게 녹여냈다.

호주 창작 콤비인 극작가 톰 라이트와 작곡가 메리 핀스터러가 쓴 오페라 '물의 정령'은 물로 상징되는 자연과 인간 사이의 대립을 다룬다. '물속 유령(Ondine)'은 수많은 클래식 작품의 주요한 소재로 쓰였다. 드보르자크의 '루살카', 차이콥스키의 '백조의 호수', 드뷔시의 '전주곡'과 라벨의 '밤의 가스파르'에도 차용됐다. '물의 정령'에서는 요정과 사람 사이의 사랑 이야기가 아닌 인간을 위협한 자연과의 대립, 하나의 문제를 각자 다른 방식으로 해결하려는 자들의 논쟁이 등장한다.

오페라 '더 라이징 월드: 물의 정령'. 예술의전당 제공

음악은 19세기 오페라의 전통적 형식을 따르지 않았다. 오페라의 정의를 확장한 바그너의 음악극(Musikdrama)처럼 아리아와 레치타티보의 경계 없이 지속적으로 선율이 흐르게 하거나, 알반 베르크의 '보체크'처럼 메시지 전달에 중점을 둔 극음악의 성격을 따랐다. 2막에는 '고대 언어'로서 한국어 낭독이 등장한다. 마치 스트라빈스키의 '오이디푸스 왕'에서 해설자의 언어가 라틴어 혹은 공연될 국가의 언어로 소리의 레이어를 만드는 것처럼, 한국어는 엄숙하면서도 진중한 느낌을 환기시켰다. 주인공들의 노래는 고대 연극 대사처럼 서술적 방식이 주를 이루고, 극의 분위기를 고조시킨 합창이 드라마를 살려낸 부분도 '오이디푸스 왕'의 형식과 닮았다. 안 그래도 낯선 초연작을 더 낯설게, 누군가에게는 신선하게 만든 요소가 됐다.

고대 시대를 배경으로 삼았지만 음악은 전자악기와 사운드스케이프를 이루는 음향 악기들, 여기에 르네상스 시대의 다성음악 형태를 아울러 '물'과 '정령'의 캐릭터를 표현했다.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서 화제가 된 현대 오페라를 지휘해 온 미국 지휘자 스티븐 오스굿과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의 연주는 소재와 시대, 악기 간 충돌이 느껴지지 않도록 매끄럽게 소화해냈다. 긴 내러티브를 정갈하게 소화해낸 김정미, 황수미, 로빈 트리츌러, 정민호의 묵직한 존재감도 훌륭했다. 특히 바이브레이션을 걷어낸 성악가들과 노이 오페라 합창단의 담백한 발성이 바로크 스타일의 다성 음악과 어우러져 내러티브가 또렷하고 깔끔하게 전달됐다.


이질감 없이 어우러진 한국적 문화 코드

오페라 '더 라이징 월드: 물의 정령'. 예술의전당 제공

흔히 한국 작곡가, 한국 제작 오페라라면 한국어 혹은 한국적 이야기를 소재로 삼아야 한다 생각한다. 억압받는 여성 혹은 역사적 위인이 난관을 헤쳐 나가는 드라마는 당장은 실패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익숙한 기존 이야기, 당위성의 한계에 머문 작품들의 생명이 얼마나 유지됐는지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많은 창작자가 음악적 이야기를 맘껏 펼칠 수 있는 좋은 대본의 부재를 어려움으로 꼽는다.

소리에 집중해 온 작곡가들은 한국어의 말맛에서 리듬을 발전시켜 온 힙합(김택수·윤한결)과, 노래로서 한국어의 뉘앙스를 잘 표현할 수 있는 판소리(진은숙·최우정)에서 영감을 받는다. 진은숙은 오페라보다는 판소리에서 한국적 극음악을 확장시키는 것에 관심이 많다며, 언어와 장르를 '아직까지는' 분리시킨다. 지난 5월에는 자신이 직접 쓴 독일어 가사로 함부르크 오페라 극장에서 두 번째 오페라 '달의 어두운 면'을 초연했다(켄트 나가노 지휘). 그런가 하면 유럽에서 활동하는 한국 연출가 요나 김이 8월 소리드라마 '심청'을 전주세계소리축제 개막작으로 무대에 올린다. 창극의 지평을 넓힌다는 차원에서, 각 분야 창작자들의 적극적인 활약상이 기대감을 모은다.

오페라 '더 라이징 월드: 물의 정령'. 예술의전당 제공

새로운 것을 제안하는 동시대 창작물은 낯설고, 때로는 논란의 여지를 만든다. 불편하고 이상한 이야기는 관객을 사유하게 하고 세상에 대한 호기심으로 성장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체코어로 쓰인 드보르자크의 '루살카'와 야나체크의 '예누파'가 세계적 오페라 극장의 레퍼토리로 자리를 잡은 게 불과 30년이 채 안 된다. 그렇다고 한국을 배경으로 한 오페라 제작의 모범 답안이 '투란도트'나 '나비부인'은 더욱 아닐 것이다. 실패를 경험하더라도 더 많은 제작 시도가 답을 마련해줄 것이다.

객원기자

Copyright © 한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