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명의 눈동자' 이후 34년이 흘렀어도 채시라의 아우라는 여전하다

박진규 칼럼니스트 2025. 5. 31. 16:32
음성재생 설정 이동 통신망에서 음성 재생 시 데이터 요금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글자 수 10,000자 초과 시 일부만 음성으로 제공합니다.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채시라, ‘단심’에서 보여준 그녀의 부활 가능성

[엔터미디어=소설가 박진규의 옆구리tv] 트렌드가 폭발한 대한민국 1990년대에는 브라운관의 수많은 여배우들 또한 각축전을 벌였다. 성숙하고 이지적인 연기파 김희애를 시작으로 친숙하고 사랑스러운 최진실, 당시에는 건강미인의 표본이었던 김혜수가 있었다. 또 청순한 외모로 선과 악의 얼굴을 넘나든 심은하, 트렌디한 이승연과 같은 X세대지만 통통 튀는 김희선과 고소영, 그리고 보이시한 매력의 신은경이나 김지호까지 다양한 스타일의 스타들이 인기를 끌었던 시대였다. 배우 채시라 역시 1980년대 후반 가나초콜릿 CF와 KBS <고교생일기>를 통해 하이틴스타로 얼굴을 알렸지만 1990년대에 확고한 인기를 끌었다.

다만 채시라는 90년대라는 특정 시기를 떠올릴 때 단번에 연상되는 배우는 아니다. 채시라는 사실 이웃집 예쁜 누나처럼 친숙한 이미지는 아니다. 그렇다고 화려한 90년대에 어울리는 트렌디한 느낌도 아니다. 오히려 과거 전통적인 여배우들처럼 아우라 있는, 고전적이고 다가서기 어려운 스타들과 계보가 이어져 있다. 그렇기에 1991년 MBC <여명의 눈동자>처럼 암울한 시대에 드라마틱한 삶을 산 여옥 같은 인물이 그녀에게는 굉장히 잘 어울린다. 극적인 상황 속에 선이 강한 삶을 살아가는 특별한 여주인공 말이다. 아마도 90년대 후반 KBS <왕과 비>를 시작으로 채시라가 사극에서 젊은 여성은 물론 노역까지 넘나들며 카리스마 넘치는 캐릭터들로 사랑받은 이유도 거기에 있을 것이다.

채시라가 오직 시대극만 연기한 것은 아니다. 90년대 현실 속의 평범한 20대 여성을 연기했고 사랑받았다. 1994년 MBC <서울의 달>의 차영숙은 많은 남성들의 사랑을 받은 현실적인 캐릭터다. 차영숙은 겉은 깍쟁이 같은 외모이지만, 달동네에 사는 평범한 회사원이며 신분상승 결혼을 꿈꾸지만 제비족 김홍식(한석규)과 의도치 않게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양아치 홍식이 오히려 그녀를 배신하고 돈 많은 여자와 결혼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마음 아파하고 괴로워한다. <서울의 달>을 통해 시청자들은 고전적인 미모의 여배우가 아름답게 우는 게 아니라 서럽게 울고 푼수처럼 웃는 모습들을 보았다. 그리고 그 감정에 공감하며 같이 울고 웃었다. <여명의 눈동자>가 채시라를 최고의 스타 자리에 올려놓았다면 <서울의 달>은 채시라를 대중에게 친숙한 배우로 바꿔놓았다.

이후 채시라는 브라운관을 통해 크게는 두 개의 캐릭터를 보여준다. 시대극을 통해서는 강인하고 극적인 인물의 모습을 부각시킨다. 하지만 MBC <아파트>나 KBS <애정의 조건> 같은 드라마에서는 뭔가 궁상맞고 소심한 인물들을 그려낸다. 하지만 대중들은 영숙의 하위호환 같은 채시라의 생활형 인물보다는 사극 속 강렬한 캐릭터를 더 좋아하지 않았나 싶다.

최근 몇 년 동안 활동이 없던 채시라가 꽤 오랜만에 대중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드라마나 영화가 아닌 정구호 연출의 전통연희극 <단심>을 통해서다. 고전설화 심청을 모티브로 한 이 작품에서 채시라는 심청의 심리를 대변하는 주인공들인 하얀 심청, 검은 심청은 아니다. 심청이 고민 끝에 인당수에 빠졌을 때 그녀를 맞아주는 용궁여왕으로 등장한다.

채시라가 용궁여왕으로 등장하는 장면은 <단심>의 가장 화려하고 아름다운 장면이다. 과거 MBC <아들의 여자>에서의 무희 장면이나 MBC 특집극 <최승희>를 통해 채시라는 춤에 어울리는 배우의 이미지 또한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이 전통연희극 <단심>에서 채시라는 대사 한 마디 없지만 표정과 몸동작만으로 용궁여왕의 위엄과 인자함을 동시에 드러낸다. 이 배우가 발화되는 대사 없이도 짧은 순간 무대를 휘어잡는 것을 보여주는 순간이다.

동시에 <단심>은 채시라가 다시 브라운관으로 돌아올 때가 되었다는 걸 보여주는 순간이기도하다. OTT 시대의 드라마는 이제 평범한 로맨스 드라마보다는 강렬하고 독특한 장르물이나 판타지물이 대세가 되었다. 채시라는 지금 이 순간의 시대보다 지금 이 순간의 상상력이 만들어낼 다양한 시간과 공간을 넘나들 수 있는 매력이 있는 배우다. <여명의 눈동자>의 여옥이자, <왕과 비>에서 젊음과 노역을 넘나든 인수대비였던 채시라는 아직도 다른 세상의 캐릭터로 변신할 수 있는 여의주를 손에 쥐고 있다.

칼럼니스트 박진규 pillgoo9@gmail.com

[사진=국립정동극장, MBC]

Copyright © 엔터미디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