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었음' 청춘 50만명…대한민국이 시들어간다

원동욱 2025. 5. 31.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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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아르바이트만 했어요. 정규직은 경력이 없으면 취업이 안 된다고 하고. 아무리 발버둥 쳐도 희망이 보이지 않는 현실에 직면하다 보니 이렇게 힘들게 고생할 바에야 그냥 쉬는 게 낫겠다 싶었습니다.”

이세욱(29·서울 동작구)씨는 올해 초부터 이력서 제출을 단념한 채 ‘쉬는 중’이다. 대학 졸업 후 반복된 단기 비정규직과 경력 단절, 그리고 끝없는 탈락 통보 속에서 “노력만으론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허무주의에 빠지게 되면서다. 그는 “몇 달째 쉬다 보니 이젠 출근하지 않아도 되는 아침이 무덤덤하게 느껴질 뿐”이라며 고개를 저었다.

그래픽=이현민 기자
‘쉬는 청년’이 최근 급격히 늘고 있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 2월 15~29세 중 쉬고 있다고 응답한 ‘쉬었음 청년’은 50만4000명으로 사상 처음 50만 명을 넘어섰다. 2003년 관련 통계 집계 이래 최대치다. ‘쉬었음 청년’은 경제활동인구조사 때 취업이나 진학 준비 없이 ‘쉬고 있다’고 답한 비경제활동 청년 인구를 일컫는다. 이들은 일도, 구직 활동도 하지 않은 채 ‘그냥’ 쉬고 있는 상태라는 점에서 구직 활동을 했음에도 취업하지 못한 ‘실업자’와는 별개로 분류된다. 지난 2월 청년 실업자는 26만9000명에 청년 실업률은 7.0%였지만 실제로는 이런 통계엔 포함되지 않은 ‘쉬었음 청년’이 두 배 가까이 더 존재하는 셈이다.
그래픽=이현민 기자
특히 ‘쉬었음 청년’ 중 지난 1년간 구직 활동 자체를 한 적이 없다고 응답한 청년도 절반이 넘는 53.4%나 됐다. 이런저런 사유로 취업을 ‘잠시 미룬’ 청년보다 1년 넘게 장기간 일할 마음조차 갖지 않은 청년이 더 많다는 얘기다. 김성희 고려대 교수는 “현실의 벽 앞에서 좌절한 청년들의 ‘쉬었음’ 기간이 길어질수록 재취업은 더욱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며 “이런 상황이 고착화·일상화되면서 결국엔 다시 도전할 의욕마저 상실한 채 구직 체념 상태에 빠지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는 것”이라고 진단했다.

“죽어라 일해도 금수저 못 따라가” 그냥 쉬는 2030…상속계급사회 돼 간다
[연합뉴스]
이모(32)씨는 2년 전부터 바깥 외출을 일절 삼간 채 집 안에만 틀어박혀 지내고 있다. 수도권 대학을 졸업했을 때만 해도 그는 꿈 많은 청년이었다. 공기업 입사를 목표로 자격증도 따며 차근차근 취업을 준비한 그는 25세 때 지방의 조그만 회사에 계약직으로 입사했다. 첫 직장이었다. “연봉은 낮아도 일단 경력을 쌓자는 생각이었죠.”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야근은 기본에 복지 혜택은 전무하다시피 했다. 결국 2년 계약 만기 후 퇴사한 뒤 당초 목표였던 공기업에 재도전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금방 재취업이 될 줄 알았어요. 그런데 1년이 지나도 합격했다는 연락은 좀처럼 오질 않더라고요.” 카페 알바와 식당 서빙 등으로 당장 급한 생활비를 충당하며 입사 서류를 계속 냈지만 돌아오는 건 ‘탈락’이란 소식뿐이었다. “공백이 길어질수록 더욱 불리해지는 느낌이었어요. 막판엔 자기소개서가 아니라 자기변명만 늘어놓는 기분이 들 정도로 절망적이었죠.” 첫 직장을 그만둔 지 2년이 지난 29세 때 그는 깊은 좌절감에 따른 우울증 증세로 정신과 치료까지 받게 되면서 끝내 구직 활동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픽=이현민 기자
취직도, 구직도 단념한 그에게 남은 공간이라곤 자신의 방뿐이었다. 그는 요즘 하루의 대부분을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를 시청하거나 온라인 게임을 하며 ‘자의 반 타의 반’ 은둔·칩거 생활 중이라고 했다. 이씨는 “쉬고 있다는 말조차 내겐 사치 같다. 그냥 ‘포기’한 상태라는 게 가장 적합한 표현”이라며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쉰다는 말조차 사치, 그냥 포기한 상태”
지난 26일 코엑스 취업 박람회에서 취준생들이 채용 공고 게시판을 살펴보고 있다. [뉴시스]
이씨와 같은 ‘쉬었음 청년’이 갈수록 늘어나는 건 일자리 부족과 기업의 경력직 선호 추세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라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분석이다. 통계청 조사에서도 청년들이 쉬는 이유로 가장 많이 꼽은 게 ‘적합한 일자리 부족(38.1%)’이었다. 이어 교육 및 자기 계발(35.0%), 번아웃·탈진(27.7%), 심리·정신적 문제(25.0%) 순이었다. 이병훈 중앙대 교수는 “대학 교육까지 마친 청년들이 마냥 쉬고 있는 건 기본적으로 갈 만한 일자리 자체가 매우 부족하기 때문”이라며 “노동시장이 이들을 제대로 흡수하지 못하면서 청년 고용 미스매치와 고학력 공급 초과 현상이 더욱 심화되고 있다”고 진단했다.
그래픽=이현민 기자
실제로 제조업 청년 취업자는 3년 연속 감소했고 대기업과 공공기관의 신규 채용도 점점 줄면서 청년들 사이에선 “아무리 좋은 스펙을 갖춰도 안정적인 일자리를 통해 한국 사회의 구성원으로 진입하는 건 하늘의 별 따기”라는 자조 섞인 목소리가 확산되고 있는 실정이다. 명문대 졸업 후 2년 만에 ‘쉬었음 청년’이 된 최서연(25)씨는 “취업 실패가 거듭되다 보니 일은 시작도 안 했는데 심신이 지쳐 당분간 쉬기로 했다”며 “주변에도 나처럼 의욕 자체를 상실한 친구들이 적잖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이에 더해 쉬는 기간이 길어질수록, 그러면서 나이가 들어갈수록 취업문은 더욱 좁아질 것이란 조바심도 청년들 마음을 옥죄고 있다. 퇴직한 지 1년이 지났다는 김다은(30)씨는 “처음엔 두 달 정도만 재충전하며 쉬려고 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내가 다시 세상에 나갈 수 있을까’ 싶어 두려워지더라”며 “아무 회사에나 갈 바엔 좀 더 쉬자는 생각과 이러다 나만 뒤처지는 건 아니냐는 초조감이 하루에도 몇 번씩 교차하고 있다”고 털어놨다.

그래픽=이현민 기자
한국고용정보원이 최근 1년 이상 ‘쉬었음’ 경험이 있는 청년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도 미취업 기간이 길수록, 일한 경험이 없을수록, 과거 일자리가 저임금에 불안정할수록 쉬었음 상태로 남아 있는 비율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또 쉬는 기간이 길어질수록 ‘재충전의 시간’이란 생각은 줄고 ‘힘든 시간, 구직 의욕을 잃게 만드는 시간’이란 인식이 증가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실제로 ‘쉬었음’ 상태가 불안하다는 응답도 77.2%에 달했다. 첫 직장 퇴사 후 1년째 쉬고 있다는 정규희(26)씨는 “과중한 초과근무에 무례한 상사까지 겪고 나니 다시 일할 생각을 하면 겁부터 난다”며 불안감을 감추지 못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넘을 수 없는 현실의 장벽이 존재한다”는 인식과 그로 인한 좌절감이 최근 청년층 사이에서 광범위하게 퍼지고 있다는 점이다. 사교육과 명문대 진학, 안정적인 직업, 주택 구입, 결혼과 출산 등 성공의 단계마다 부모의 경제력과 정보력, 사회적 네트워크 등 ‘부모 찬스’가 결정적 변수로 작용하는 냉엄한 현실과 마주하다 보니 “죽어라 일해도 금수저 못 따라간다”는 허무주의가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다는 얘기다. 취준생 서재현(27)씨는 “전세도 못 구하고 재산도 마이너스 상태지만 ‘되는 사람만 되는’ 현실을 지켜보다 보면 계속 도전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나 싶은 마음뿐”이라고 했다.

일본 ‘로스제네’ 현상, 한국도 재연 우려
부동산 양극화도 이 같은 격차를 더욱 키우는 요인 중 하나로 꼽힌다. 보유 자산의 대부분을 부동산이 차지하는 현실 속에서 주택 마련에 부모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느냐 여부가 청년들 삶의 질을 일찌감치 결정짓고 있다는 점에서다. 한국은행 조사에서도 2023년 청년층 상위 20%의 소득은 하위 20%의 2.5배인 데 비해 부동산 등 순자산 격차는 무려 38배에 달했다. 최근 주택 구입을 위해 대출을 받은 이성찬(34)씨는 “여기서 집값이 더 오르면 평생 살 수 없겠다는 생각에 무리하게 ‘영끌’을 했는데, 그 많은 이자를 내기 위해 거의 최저 수준의 생활을 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 때면 그저 앞이 캄캄할 뿐”이라며 고개를 떨궜다.

영국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가 최근 “상속계급사회(inheritocracy)의 고착화가 경제의 안정성을 크게 위협하고 있다”고 경고하고 나선 것도 같은 맥락이다. 베이비부머 세대가 주택가격 상승 등으로 축적한 자산을 자녀들에게 물려주면서 노동소득보다 상속·세습자산이 청년층 생활 수준에 훨씬 더 영향을 미치게 됐고, 이로 인해 ‘노력=계층 상승’이란 정상적인 계층 이동 방식이 붕괴되고 있다는 지적이다.

전문가들은 이런 상황이 지속될 경우 과거 일본의 거품경제가 꺼지며 최악의 취업난이 닥쳤을 때 심각한 사회 문제로 떠올랐던 ‘로스제네(잃어버린 세대)’ 현상이 한국에서도 재연될 가능성이 크다고 우려하고 있다. 잇단 취업 실패 후 집 안에만 틀어박혀 살아가는 ‘히키코모리(은둔형 외톨이)’가 급속히 늘어날 것이란 우울한 전망도 나온다. 이미 지난해 국무조정실 조사에서도 집에만 있는 고립·은둔 청년이 5.2%에 달하는 것으로 집계됐다.

일각에선 절망에 빠진 청년들이 코인이나 주식 등으로 ‘한방’을 꿈꾸는 분위기를 경계하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박모(28)씨는 대학 졸업 후 스타트업 인턴으로 근무하다 정규직 전환이 무산되자 자격증을 따며 준비한 끝에 중소 정보기술(IT) 업체 재취업에 성공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회사가 1년 반 만에 폐업하면서 졸지에 다시 실업자 신세가 됐다. 배달 알바를 하며 계속 도전장을 냈지만 번번이 고배를 마신 그는 결국 모아둔 돈으로 코인과 미국 주식에 투자하는 승부수를 띄웠다. 결과는 참담한 실패. 그는 “지금은 ‘그냥’ 쉬는 중”이라며 “다시 일자리에 도전하느니 차라리 쉬는 게 덜 괴로운 선택”이라며 말끝을 흐렸다.

전문가들은 ‘쉬었음 청년’ 문제를 해결하려면 단순한 일자리 정책 이상의 종합적인 대책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우리 사회의 미래가 걸린 문제인 만큼 새로 출범하는 정부도 더 늦기 전에 기업·학계·시민단체 등과 범국가적 차원에서 머리를 맞대야 한다는 주문이다. 이병훈 교수는 “기존의 청년 고용정책이 대부분 실패한 점을 반면교사 삼아 유럽연합(EU)처럼 ‘한국형 청년보장제’를 도입하는 등 과감한 정책 패러다임 전환에 나서야 할 때”라고 말했다.

원동욱 기자 won.dongwoo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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