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현의 미술래잡기] 이성이 잠들면 안 되는 시간

2025. 5. 30. 17:21
음성재생 설정 이동 통신망에서 음성 재생 시 데이터 요금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글자 수 10,000자 초과 시 일부만 음성으로 제공합니다.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고야 연작 '변덕' 중 43번째作
편견·맹신을 동물로 표현하며
이성 마비된 사회에 경종 울려
선거는 우리 삶의 기준잡는 일
생각 멈추면 괴물 더욱더 커져
바로 유권자의 힘 중요한 이유
고야의 '이성이 잠들면 괴물이 깨어난다'.

대한민국이 또 한 번 중요한 선택을 한다. 언제나 그렇지만, 이번 대선은 유난히 격변하는 세계에서 누가 우리를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고 갈 수 있을지를 정하는 순간이다. 우리는 과연 올바른 선택을 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이 질문을 마음에 두고 18세기 스페인 화가 프란시스코 고야의 작품을 들여다본다. 고야는 스페인의 궁정 화가로서 유력 인사들의 초상화를 개성 있게 표현하며 승승장구하면서도 전통을 막연히 답습하지 않고 예술의 새로운 가능성을 끊임없이 탐구한 화가였다. 특히 18세기 말에도 여전히 미신과 망상이 난무하던 당시 사회의 부조리함을 풍자한 80개의 판화 연작 '변덕(Los Caprichos)'을 만들었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오늘날의 현실에 경종을 울려주는 작품이 바로 43번째 동판화인 '이성이 잠들면 괴물이 깨어난다'이다.

그림 속에는 한 남자가 책상에 고개를 묻고 깊은 잠에 빠져들어 있고 그 뒤로 박쥐와 올빼미, 그리고 정확히 무엇인지 불확실한 동물들이 날개를 퍼덕이고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어둠 속에서 으스스하게 그를 에워싸고 있다. 거친 음영 대비 속에서 전체적인 분위기는 어쩐지 불안한데, 화면 아래쪽에 작품의 제목이자 주제인 "이성이 잠들면 괴물이 깨어난다"란 문장이 적혀 있다.

어떤 면에서 고야는 예술가로서 머리로 생각하는 이성을 내려놓았을 때에만 경험할 수 있는 상상의 세계가 훌륭한 예술의 영감이 될 수 있다고도 믿었다. 그림에서 보이듯이 공포스러운 환영이나 광기 어린 예술혼은 머리만으로는 생각해낼 수 없는 것이라 여겼고, 그런 환상의 세계가 예술가에게는 큰 도움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줬다. 그러나 그런 경우에도 고야는 꼭 이성이 중심을 잡아줘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계몽주의자였던 고야는 이성과 감성을 명확하게 구분했다. 특히 작품 속에 등장하는 올빼미는 스페인에서 전통적으로 어리석음을, 박쥐는 무지함을 상징하는 동물로 그 의미가 확실하다. 인간의 이성이 멈춰 비판적 사고 능력이 마비되는 순간, 편견·맹신·증오·공포 같은 악랄한 면모들이 여기저기에 나타나버리는 것을 으스스한 동물들로 치환시킨 것이다.

특히 어떤 동물은 남자가 아닌 화면 밖의 우리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는데, 이는 이성을 잠재워버린 그의 꿈이 그림 속 남자뿐 아니라 현실의 우리까지 위협할 수 있음을 경고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고야는 이 작품을 통해 괴물은 어떤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키워낼 수 있음을 일깨워준다. 반대로 말하면, '이성이 잠들면 괴물이 깨어난다'는 우리에게 아직 늦지 않았다고 가르쳐주는 것이기도 하다. 아직 잠들지 않았다면, 아니 혹시 잠들었더라도 잠에서 다시 깨어날 수만 있다면, 우리 힘으로 괴물이 나타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것이다.

지금 대한민국 유권자들은 수많은 정보 속에서 선택의 순간을 맞이하고 있다. 정책보다 네거티브가 난무하고 가짜뉴스, 짧은 영상 클립, 과장된 이슈들이 유권자를 미혹하며 감정을 자극하며, 분노와 혐오가 정치적 연료가 되어버렸다. 바로 이런 것들이 고야가 말한 '이성이 잠든 시간'이다. 진실을 추구하는 이성적인 판단 대신 "그냥 이게 좋을 것 같다"는 기분에 내 선택을 맡기는 순간, 괴물이 스르르 깨어난다.

그런 의미에서는 후보자의 면면보다 우리 유권자의 책임이 더 크다고 할 수 있는 것이, 괴물이 등장하는 이유가 그 괴물이 강력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그 괴물의 등장을 허용했기 때문이다. 이성을 깨운다는 건 자신이 믿고 싶은 것만을 감정적으로 선택하는 경향을 의심하고 판단을 멈추지 않는 태도로 귀결된다.

결국 선거란 누구를 뽑는 문제가 아니라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내가 살아가는 삶의 이성적인 기준이 무엇인지를 돌아보고 다잡는 문제인 것이다.

다가오는 대선에서 우리는 이름 하나에 도장을 찍으면서 우리의 신념을 투표함에 함께 집어넣는다. 공부하고, 고민하고, 연구하자. 나의 판단으로 괴물이 깨어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이지현 OCI미술관장(미술사)]

Copyright © 매일경제 & mk.co.kr.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