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커피에 다른 향미 나는 모차르트 매직 [오스트리아 빈, 카페와 음악]
'피가로의 결혼' 쓴 전성기 돔가세 저택에 생긴 박물관
미완성 유작 '레퀴엠' 초연으로 추도 미사를 연 교회
가장 오래된 '카페 모차르트'까지 곳곳에 그의 기억들

■모차르트하우스비엔나
잘츠부르크 출신인 모차르트는 스물다섯 살이던 1781년 빈으로 올라가 10년간 살았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세월 동안 그는 빈의 여러 곳을 옮겨 다니며 거처했다. 많은 돈을 벌었지만 낭비벽이 심해 한 번도 자택을 소유한 적은 없었고 모두 셋집이었다.

당시 콜로레도는 계몽주의자였으며 낭비와 사치에 물들어 붕괴 직전인 도시를 되살리기 위해 근검절약과 근면성실, 교육발전을 주된 내용으로 하는 사회개혁을 외쳤다. 전임 대주교 슈라텐바흐의 특혜를 받으며 자유분방하게 살던 모차르트에게는 이 같은 개혁이 ‘몸에 맞지 않는 옷’ 같은 것이었다.
모차르트는 돈을 더 벌고 싶었고, 그러기 위해서는 잘츠부르크 궁정악단에서 나가야 했다. 그가 돈을 벌겠다면서 콜로레도 대주교에게 사직서를 낸 곳이 바로 독일기사단궁전이었다.

잘츠부르크의 월급쟁이 악사 노릇을 그만둔 모차르트는 장모가 운영하던 밀히가세의 하숙집, 지금은 명품가게가 들어간 그라벤거리의 셋집 등 빈 시내 곳곳을 돌아다니며 살았다.
독일기사단궁전에서 나와 그라벤거리로 가면 파란 돔 지붕이 인상적이며 빈에서 가장 오래된 장크트페터교회가 나타난다. 교회 옆으로 돌아가면 그가 빈에서 처음 살았던 하숙집 건물이 나온다. 건물 벽에는 모차르트 이야기를 설명하는 명패가 붙었다.
마침 관광객용 마차 두 대가 하숙집 앞을 지나간다. 마부가 힐끔 건물을 쳐다보는 걸로 판단해 보건대 손님들에게 집의 내력을 설명해주는 모양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모차르트는 여러 면에서 아버지 레오폴트와 닮았다는 사실이다. 레오폴트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 혼자 잘살겠다며 어머니의 눈물을 뒤로 한 채 독일 아우크스부르크의 가족을 버리고 잘츠부르크로 갔는데, 모차르트도 혼자 성공하겠다며 아버지의 만류를 뿌리치고 빈으로 간 것이었다. 또 레오폴트는 어머니의 허가도 얻지 않고 가족 중 누구도 참석하지 않은 상황에서 잘츠부르크대성당에서 결혼했는데 모차르트도 똑같이 아버지 승낙을 받지 않고 아버지, 누나가 불참한 가운데 슈테판대성당에서 결혼했다. 자신과 똑같은 방식으로 세상을 사는 아들을 보는 레오폴트의 심정은 과연 어떠했을까.

많은 사람이 가진 두 번째 오해는 그가 ‘평생 빈곤에 시달렸다’는 것이다. 1980년대 영화 ‘아마데우스’도 그런 스토리로 전개되는데 이것도 사실과 매우 큰 차이가 있다. 그는 연간 1000굴덴만 벌면 고소득자로 치부되던 당시에 10년간 연평균 1만 굴덴을 벌었다. 월세가 잘츠부르크에서 받던 연봉과 비슷할 정도로 비쌌던 돔가세 고급저택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돈벌이가 엄청난 덕분이었다. 그가 그런데도 말년에 쪼들렸던 것은 귀족에게 기죽기 싫어 사치를 부린 데다 당구 도박에 빠져 돈을 많이 잃은 게 이유였다. 여기에 알코올 중독자이기도 했다.

놀랍게도 모차르트하우스가 사람들의 관심을 끌게 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나치 덕분(?)이었다. 오스트리아를 합병한 나치는 정권을 장악한 민사당을 앞세워 모차르트 사망 150주년이었던 1941년 ‘제국 독일 모차르트 주간’ 행사를 열었다. ‘게르만 우월주의’를 과시하는 데에 음악 분야에서 모차르트만 한 인물은 없었다. 이 행사 때 모차르트하우스가 처음 대중에게 공개됐고 박물관으로 변하는 계기가 됐다.
■카페 프라우엔후버

모차르트는 한창 잘나갈 때에는 대형 공연장에서 귀족 수백 명을 모아놓고 연주회를 열어 한 번에 수백 굴덴을 버는 게 일상적이었지만 세상을 떠나기 수년 전부터는 한 푼에도 쩔쩔맸다. 그래서 이곳처럼 작은 식당에서도 연주회를 열곤 했다. 그가 죽기 전 마지막 연주회를 열었던 곳도 여기였다. 그가 연주한 곡은 피아노 협주곡 27번이었다. 그가 죽은 뒤 완성된 유작 ‘레퀴엠’이 초연된 곳도 여기였다. 카페 입구 벽에는 모차르트의 사연을 담은 명패가 붙어 있다.

할아버지 같은 노직원이 웃으며 가져다준 메뉴판에서 발견한 ‘모차르트커피’를 주문한다. 빈 어디에서나 마실 수 있는 멜란지커피인데 이름만 모차르트라고 붙인 것이다. 그래도 그런 이름이 달린 커피를 마셨다는 게 어딘가.
아직 입안을 감도는 커피 맛을 느끼며 카페 프라우엔후버에서 나온다. 이제 모차르트가 인생의 마지막 순간을 맞은 장소로 가야 한다.

모차르트가 세상을 떠날 때 있던 건물은 사라졌고 그 자리에 백화점이 들어섰다. 백화점 측은 벽에 ‘모차르트가 눈을 감은 곳’이라는 안내판을 붙였는데 그걸 보러 매일 많은 사람이 찾아간다.
모차르트의 죽음과 관련해서 다시 사람들의 오해가 등장한다. 영화 ‘아마데우스’ 때문에 널리 퍼진 내용이기도 한데, 그가 ‘질투에 사로잡힌 라이벌 살리에리에 의해 독살됐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음악사학자들은 이런 주장을 전면 부인한다. 빈에서 존경받으며 부유하게 살던 살리에리가 친하게 지냈던 모차르트를 독살할 이유도 없고, 시신에서 독살 흔적도 없었다는 것이다.
모차르트는 어릴 때부터 몸이 약했다. 갓난아기일 때 어머니에게서 모유를 먹지 못해 체력이 허약했던 데다 각종 병에 걸려 죽을 고비도 여러 번 넘긴 탓이었다. 그는 인생 말년에는 죽음에 관심을 많이 보였다. ‘오래 전부터 혀끝에서 죽음의 맛을 느꼈다’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장크트미하일러교회

모차르트의 유작 ‘레퀴엠’과 장례 미사 이야기가 생각난 김에 슈테판대성당에서 그라벤거리~콜마르크거리를 지나 호프부르크왕궁 쪽으로 향한다. 왕궁 앞에는 미하엘러플라츠광장이 있고 광장 구석에는 13세기에 만들어진 작은 성소 장크트미하일러교회가 보인다.

35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한 대작곡가의 불운을 안타까워하면서 잠시 휴식을 위해 오페라하우스를 향해 발걸음을 옮긴다. 그곳 앞에는 빈에서 가장 오래된 카페인 ‘카페 모차르트’가 있다. 모차르트가 세상을 떠나고 3년 뒤인 1794년 문을 연 곳인데, 1869년 카페 바로 앞에 모차르트 동상이 세워지자 이름을 ‘카페 모차르트’로 바꿨다. 그 덕분에 오페라하우스 가수, 작곡가 등 음악인은 물론 빈의 내로라하는 예술인들이 대거 찾는 명소가 됐다.



쇤브룬궁전 콘서트 입장객은 300여 명에 이르렀다. 이번 음악여행에서도 절실히 느낀 것이지만 음악과 관련된 장소에는 일본인이 꽤 많다. 이곳에도 50여 명에 이르는 일본 단체관광객이 자리를 채워 음악에 귀를 기울였다. 한국인은 개별적으로 찾아온 서너 명에 불과했다.
둘러보는 수준이 아니라 연주를 들어본다는 기대가 적지 않았지만 솔직히 간이 연주회여서 수준은 만족스럽지 못했다. 그래도 다른 곳도 아니고, 모차르트가 직접 작곡한 오페라를 공연했던 오랑제리에서 음악을 들었다는 게 어디 보통 일인가. 빈(오스트리아)=남태우 기자 leo@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