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의 방] 유연하게 세상을 품은 특별함 | 전원생활
이 기사는 전원의 꿈 일구는 생활정보지 월간 ‘전원생활’ 5월호 기사입니다.
“예전에는 풍경화나 인물화 같은 일상적인 작업을 했어요. 그러면서 나만의 독특한 소재로 작업하고 싶다는 갈증이 있었죠. 그 갈증을 해소하려고 대학원에 갔어요. 나에게 적합한 것은 무엇인지 깊이 고민했는데, 은사님께서 ‘너무 멀리서 찾지 말고, 가장 가까운 네 발 아래부터 찾아봐라.’라고 말씀해주셨어요.”

그는 가까운 곳에서 자신을 표현할 소재를 찾았다. 동양에서 태어나 살아가는 여성이 떠올랐다. 여성은 자연스레 어머니로 연결됐고, 어머니의 소품에 관심이 갔다.
“어머니가 시집올 때 가지고 오셨던 자수 이불이 눈에 띄었어요. 이불보를 뜯어 와서 뭘 해볼까 하다가 싸매봤어요. 그렇게 보자기에 접근하게 됐죠.”
그는 보자기를 그리기로 하고, 보자기에 관한 공부를 시작했다. 한국을 대표하는 석학인 이어령 선생의 저서 <우리 문화 박물지>에서 많은 힌트를 얻었다.
“<우리 문화 박물지>에는 다듬이, 항아리 등 한국적인 물건들이 소개돼 있어요. 보자기에 관한 내용도 있죠. 책을 읽고 보자기가 단순히 물건을 싸는 것뿐만 아니라, 뭔가를 품어주는 포용성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인연이란 참 신기하다. 이 선생의 보자기 설명에 영향을 받은 그의 작품은, 시간이 지나 이 선생의 또 다른 저서인 <어어령의 보자기 인문학>의 표지를 장식하게 됐다.
“보자기는 다양한 용도가 있어요. 화려한 보자기는 상대방에게 선물을 전할 때 사용해요. 제가 그리는 보자기 형상은 단순하게 물건을 싼 보따리가 아닌, 상대방에게 마음을 전하고 소통하는 도구예요. 작품이 그림을 넘어서 상대방과 소통하는 역할을 하길 바라죠. 그런 마음에서 ‘The Precious Message(소중한 메시지)’라는 작품명을 썼어요.”
극사실적으로 보자기를 그려낸 그의 작품을 보고, 그림이 아닌 실제 보자기로 오해하는 사람도 있다. 사실적인 작품의 탄생은 철저한 계획이 선행돼야 한다.

“제가 하는 작업은 묘사하는 작업이라 실물이 있어야 해요. 그냥 상상해서는 그릴 수가 없죠. 원단 시장에서 천을 구매하는 것부터 시작이에요. 오방색이나 색동, 고전적인 무늬 등 한국적인 요소가 들어간 천을 찾으려고 하죠. 원하는 천을 구매해서 네모나게 박음질해 보자기를 만들어요. 시장에 원하는 천이 없을 땐 무늬가 없는 공단을 구매해서 프린트를 맡겨 제작하기도 해요. 완성된 보자기를 작업실에 가져온 후 여러 번 묶었다 풀었다 하면서 다양한 각도로 사진을 찍어요. 수백 컷의 사진 중 마음에 드는 사진을 고르고 그리는 작업을 시작하죠.”
작업실 모니터에는 촬영한 보자기 사진이 띄워져 있다. 실물이 아닌 사진을 보고 그려야 정확하게 묘사할 수 있다. 실물 보자기는 시간이 지나며 매듭이 느슨해지기도 하고, 움직이면 주름의 그림자 모양이 변하기도 한다. 그는 보자기의 부드러움을 표현하려 물감을 붓으로 그러데이션하는 글레이징 기법을 사용한다.
“이 작업은 유화로만 할 수 있어요. 물로 농도를 조절하는 아크릴물감은 붓질을 하면 금방 말라요. 반면 유화는 기름 성분이 있어서 오랫동안 글레이징 기법으로 작업할 수 있어요.”

사실적인 묘사에도, 유화를 말리는 데도 긴 시간이 소요된다. 그는 오전 10시에 작업실에 출근해 밤 10시가 돼서야 퇴근한다. 주말에도 특별한 일이 있을 때를 제외하곤 늘 작업실에 머문다.
“작업실에서 작업해야 마음이 편해요. 예전에는 작업하면서 건강에 소홀하기도 했는데, 지금은 오래 작업하려면 체력이 중요하단 걸 알아요. 그래서 작업실에 간단한 운동기구도 가져다 놨죠. 작업하는 중간에 운동을 해야 몸이 굳지 않아요. 생활 속에서 조금씩 운동하면서 작업할 체력을 기르고 있어요.”
“이 보자기는 여성을 의인화했다고 볼 수 있어요. 현대 여성이 아닌 고전적인 여성이죠. 비녀나 노리개, 족두리 등 과거의 여성과 관계된 장신구를 보자기와 함께 표현했어요. 특히 비녀를 많이 그렸죠. 누구나 보자기를 그릴 수는 있지만, 보자기에 비녀가 꽂혀 있는 걸 보면 ‘김시현의 작품’이라는 인상을 주고 싶었어요.”
그는 보자기라는 큰 주제를 중심으로 갈래를 나눠 작업한다. 그중에는 보자기에 상업성을 더한 작업도 있는데, ‘코카콜라’ 로고 무늬 보자기 작품이 대표적이다.

“보자기가 전통적인 물건이잖아요. 오래된 물건을 그대로 그려서 답습하기보다는 재창조하는 게 작가라고 생각해요. 보자기와 반대되는 상업적인 이미지를 찾다가 코카콜라를 선택하게 됐어요. 앞으로 기업과 협업 생각도 있어요. 서로 성격이 상반되는 전통과 상업이 만났을 때 어떤 시너지가 발현될지 궁금해요.”
상업성이 더해진 보자기 외에도 가방과 합쳐진 보자기, 안에 들어 있는 물건이 보이는 투명한 보자기, 한글이 숨어 있는 보자기 등 다양한 시리즈가 있다. 그는 새로운 작품을 보여주기 위해 늘 고민한다.
“오늘날 보자기는 우리 일상생활에서 많이 쓰이지 않고, 젊은 세대에게는 더욱 낯선 물건이에요. 시대를 뛰어넘어서 지금을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들이 한국적 소재인 보자기 하나로 공감했으면 좋겠어요. 작가들도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시대적인 메시지를 내는 작품을 보여줬으면 해요.”
그는 올해 다양한 전시로 사람들에게 메시지를 전하려 한다. 5월 24일부터 6월 21일까지 부산 ‘갤러리 한스’에서 개인전을 열 예정이다. 그의 작품을 감상하는 이들에게 그가 그린 보자기가 품은 소중한 메시지가 잘 전달되길 바란다.
글 허연선 기자 | 사진 전승 기자, 김시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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