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당 최남선이 세운 출판사 신문관 식민지 조선의 계몽을 꿈꾸다 [.txt]
책·잡지·신문이 신지식과 민족운동의 토대 구실

처 ……‥ ㄹ썩, 처 ……‥ ㄹ썩, 척, ……‥ 쏴아
따린다 부순다 무너 바린다.
태산 같은 높은 뫼. 집채 같은 바윗돌이나.
요것이 무어야, 요게 무어야.
나의 큰 힘 아나냐, 모르나냐, 호통까지 하면서
따린다, 부순다, 무너 바린다.
처 ……‥ ㄹ썩, 처 ……‥ 썩, 척, 튜르릉, 콱.

한국 현대시의 효시로 평가받는 육당 최남선의 ‘해(海)에게서 소년에게’의 첫 대목이다. 시조의 엄격한 정형률을 깨뜨린 형식 파괴에 공감각적 장쾌함까지 갖췄다. 시가 발표된 것은 1908년 11월 1일, 한국 역사상 최초의 근대적 잡지 ‘소년’ 창간호에 실렸다. 잡지를 간행한 곳은 신문관(新文館) . 1907년 최남선이 세운 민간 출판사였다.
‘소년’은 일본이 대한제국을 강제합병한 이듬해인 1911년 5월 “치안을 방해”한다는 이유로 일제 조선총독부의 ‘폐간’ 처분을 받았다. 신문관은 그 뒤에도 1913년 한 해에만 ‘붉은 져고리’, ‘아이들보이’, ‘새별’까지 어린이·청소년 정기 간행물을 잇달아 출간했다. 1914년 10월에는 종합교양지 ‘청춘’을 창간했다. ‘청춘’은 과학, 세계사와 세계 지리, 조선의 역사와 지리 등 인문·사회·자연과학을 두루 아우른 기사와 논설을 실었다.

‘근대 조선 출판문화의 탄생’은 조선 근대사와 미디어사를 전공한 일본 학자 다나카 미카의 2022년 저작이다. 부제 ‘신문관·최남선과 근대 일본’까지 원저 제목 그대로다. 근대 조선 출판의 중심에 있었던 최남선을 비롯한 조선의 지식인들이 어떻게 식민지 조국의 민중 계몽을 꾀하고 독자적인 출판문화를 발전시키려 했는지를 실증적으로 탐구했다. 한국과 일본의 방대한 사료와 간행물들을 꼼꼼히 분석해 그 계보를 정리하고 역사적 의미를 추출했다. 또 “동시대 조선과 일본의 출판계가 관계 맺는 양상을 고찰해 ‘일국사(一國史)’를 뛰어넘는 틀에서 근대 조선에서 출판문화가 형성되는 과정을 고찰”했다. 일본의 한국학 연구가 상당한 수준임을 보여주는 역작이다. 다나카는 1990년생, 서른다섯살 젊은 연구자다.
지은이는“최남선의 출판 활동과 민족운동의 근원지로서 식민지 조선의 ‘아카데미아’라고도 평가받는 신문관의 실태를 해명하는 것은 근대 조선 출판문화의 형성 과정을 해명하는 것과 통한다”고 봤다. “조선에서는 일본의 침략이 본격화한 1905년 이후 항일운동은 물론 새로운 지식과 새로운 사상이 들어옴에 따라 여러 종류의 민족운동과 문예활동 등 다양한 운동이 전개되었는데, 그 토대에는 책과 잡지, 신문 등의 출판물이 있었다.”

구한말인 1880년대부터 1910년 새 조선에서도 근대적 출판물들이 나오기 시작했지만 대부분 정부 정책이나 특정 단체의 이념을 전파하는 기관지 성격이었다. 다양한 삽화, 독자 투고, 교양 지식이 풍부한 상업 출판물은 1920년대 들어 만발했다. 1910년 일본은 조선을 합병하고 조선총독부를 설치한 뒤 강압적인 ‘무단 통치’를 했는데, 1919년 최대 규모의 민중운동인 3·1 독립운동이 일어나자 깜짝 놀라 ‘문화 정치’라는 유화정책을 채택하면서였다. 바짝 죈 고삐가 살짝 풀린 틈새로 ‘개벽’을 비롯한 잡지가 속속 간행됐다. 민간신문인 동아일보와 조선일보가 창간(1920년)된 것도 이 시기였다.
앞서 1910년대 중반까지 신문관은 오늘날 문고본 시리즈와 비슷한 ‘십전총서’, ‘육전소설’ 등 저가의 총서류와 외국 문학 번역서도 일본어 중역본으로 쏟아냈다. ‘걸늬버 유람기’(최남선 번역), ‘불상한 동무’(플랜더스의 개, 최남선 번역), ‘검둥의 설움’(엉클 톰의 오두막, 이광수 번역), ‘허풍선이 모험기담’ 등이 조선의 독자와 만났다.


신문관이 무단통치 시기인 1910년대에도 간행물을 계속 낼 수 있었던 것은 조선총독부의 언론 통제를 피하려 어린이책들에 집중했던 덕분이었다. 통제는 신문지법(1907년 제정)과 출판법(1909년 제정)으로 이뤄졌다. 공식 합방 이전부터 조선인의 사상과 언론이 일제의 검열 아래 놓였던 것. 최남선은 어린이 잡지 형식을 빌려 동포의 민족혼과 저항정신을 기르려 했다. 특히 나라와 민족의 장래를 떠맡을 소년들의 교육과 계몽이 절박한 과제였다. 1911년 5월 폐간된 ‘소년’ 마지막호에는 독립운동가 박은식의 ‘왕양명선생실기’가 거의 모든 지면을 차지했다. 15세기 중국 명나라 왕양명의 실천적 사상이 민족운동에도 유용하다는 걸 시사해주는 것이었다.

월간 ‘청춘’은 청년 이상 성인을 독자층으로 삼은 종합교양지였다. 창간(1914년) 초기에는 일제의 검열을 의식해 “세계 각국의 문화·풍습·종교·유적 등 세계적 지식”을 주로 담았다. 그러나 2년여 정간 뒤 1917년 5월 격월간으로 복간되고부터는 민족적 자부심을 고취하는 색채가 훨씬 뚜렷해졌다. “사죄(죽을죄)의 환을 당할지도 모르는 경우에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루터의 종교개혁(제7호), “청춘인의 감정을 함양”하는 나폴레옹 격언집(제8호), “역경에 대처하는 정신 수양”을 위한 ‘분투하는 위인’들 이야기가 잇따라 실렸다. ‘청춘’은 결국 1918년 9월 통권 15호로 폐간당했다.

그로부터 다섯달 뒤인 1919년 3월, 스물아홉살 청춘 최남선은 ‘3·1 독립선언서’ 초안을 썼다가 일제에 체포됐다. 2년 반을 복역하고 1921년 10월 가석방된 뒤에는 단군 연구를 중심으로 한국사 연구에 전념했다. 1922년에는 신문관이 문을 닫았다. 그가 출판을 통해 민중 계몽, 민족 자강을 이루려던 꿈도 사실상 막을 내렸다. 최남선은 1928년 조선총독부 산하 조선사편수회 위원으로 촉탁되면서부터는 친일 행적을 보이기 시작했다. 지은이는 서양의 문학작품의 일본어 번역본을 다시 한국말로 옮기면서도 일본 색채를 지우려 애썼던 “식민지를 산 지식인의 심경”에 안타까운 공감을 표현하기도 했다.

지은이는 독립선언서의 마지막 부분이 “최남선이 청춘에서 1917년 이후로 민중을 계몽하려던 내용과 통하는 면이 있”다고 평가했다. 특히 독립선언서에 ‘남녀노소’라는 문구가 쓰인 점은 “최남선이 계몽하려 한 대상에 어린이와 여성도 포함되었음을 시사한다”고 했다. 지은이가 책에 직접 인용한 마지막 대목은 이렇다.
“오등(吾等)이 자(玆)에 분기(奮起 )하도다. 양심(良心)이 아(我)와 동존(同存) 하며 진리(眞理)가 아(我)와 병진(幷進)하는도다. 남녀노소(男女老少) 업시 음울(陰鬱)한 고소(古巢)로서 활발(活潑)히 기래(起來)하야 만휘군상(萬彙群象)으로 더부러 흔쾌(欣快)한 부활(復活)을 성수(成遂)하게 되도다.”
이를 ‘쉽고 바르게 읽는 3.1독립선언서’로 풀이하면 이렇다.
“그래서 우리는 떨쳐 일어나는 것이다. 양심이 나와 함께 있으며 진리가 나와 함께 나아간다. 남녀노소 구별 없이 어둡고 낡은 옛집에서 뛰쳐나와, 세상 모두와 함께 즐겁고 새롭게 되살아날 것이다.”(2019년, 대통령 직속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
조일준 선임기자 ilj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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