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황 칼럼] 현실 외교는 '회피할 수 없는 선택'
인계 철선 주한미군, 동북아 전초기지로
동맹 재조정 파고, 새 정부에 밀려온다

오래전 주한 미국대사관에서 나돌던 우스갯소리가 있다. 노무현 정부 시절엔 미국이 뭘 들고 가면 보지도 않고 '노'라고 하고, 뒤를 이은 이명박 정부는 보지도 않고 '예스' 한다는 농담이다. 노무현 정부 시절 한미 정상회담은 참모들이 좌불안석일 만큼 위태위태했다. 노 대통령 말처럼 해외투자자가 전쟁보다 동맹의 장래에 신경 썼던 건 삐걱거리던 당시 한미관계를 드러낸다.
균형자론을 내세웠던 노 대통령에게 현실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북한의 핵확산금지조약 탈퇴로 북핵 위기가 다시 찾아온 참이었다. 이란, 이라크와 함께 북한을 악의 축으로 규정한 미국은 북한 핵시설 공격을 거론했다. 그 와중에 9·11테러 뒤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한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에 이어 대량살상무기 개발과 알카에다 지원 의혹을 빌미로 이라크와의 개전에 들어갔다. 미국은 파병 압력을 강하게 넣은 반면 명분 없는 전쟁에 대한 여당 내부와 지지세력 반발로 참여정부는 진퇴양난 형국이었다. 노 대통령은 파병을 결정했다. 비전투 병력이지만 3,600명은 월남전 이후 최대 규모다. 대통령 임기 첫해인 2003년의 일이다. 지지층 이반의 시발점이 됐지만 노 대통령은 옳다고 믿어서가 아니라 대통령으로서 '회피할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했다. 원칙과 현실 외교의 먼 간극을 보여주는 사례다.
공교롭게도 참여정부 시절 동맹 재조정의 파고가 지금 몰려오고 있다. 세계 동시 전쟁의 버거움을 극복하기 위한 해외 주둔군의 신속기동군화와 전시작전통제권 환수 등 안보 자주성을 높이기 위한 한미 간의 이해 조정이 낳은 산물이 전략적 유연성이다. 주한미군의 해외 투입 필요성 존중과 우리 의지 없이 동북아 분쟁에 개입되지 않는다는 쌍방 입장을 담은 애매한 합의다. 그 후 20년 동안 안보 정세가 크게 변했다. 북한은 핵무력을 완성했고 러시아와 또 혈맹을 맺었다. 미중 충돌 격화로 대만문제는 동북아 불안정의 큰 불씨가 됐다. 중국은 대만 침공을 공공연히 거론한다. 타협 불허의 국가 핵심 이익임을 행동으로 보여주는 셈이다. 반면 바이든 시대는 물론 트럼프 2기 들어 중국 견제는 미국의 경제와 안보 최대 현안이 됐다. 쌍방의 태평양 제해권 경쟁은 거세졌고 대만은 핵심 충돌지점이다.
주한미군 사령관은 지금을 1차세계대전 후 ‘20년의 위기’를 일컫는 전간기라고 칭하고, 한국을 ‘고정 항모’라고도 했다. 미국의 군사 전략에서 인계철선이던 주한미군 역할은 중국과 러시아까지 겨냥한 동북아 전초기지로 전환됐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유력 주자인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는 한미동맹 축과 한미일 협력과 한일파트너십을 방점으로 중러를 관리해 나가겠다고 한다. 수시로 국익 중심의 실용외교를 말한다. 북한 인권의 진전을 이루겠다고도 했다. 친중과 대북접근에 대한 일각의 불안을 의식한 원론적 수준이다. 유세에선 “대만하고 중국이 싸우든지 말든지 우리랑 무슨 상관이냐. 틀린 말을 했느냐”고 기왕의 ‘셰셰 외교’ 논란에 대한 돌파도 시도했다. 감사의 말로 떼울 수 있다면 노무현처럼 고뇌의 밤을 지새울 일도 없다. 더 강력한 상대와 위험해진 안보 환경이 도사린 지금의 현실 외교는 노무현 시기보다 엄혹하다. 트럼프는 대한민국 새 정부를 상대로 전략 재편의 청구서를 내밀 기회만 보고 있다. 방위비 수준의 문제가 아닐 것이다.
노무현은 북핵 위기 돌파를 위해 이라크 파병을 결정했다. 북한을 악으로만 보는 미국을 테이블에 앉히고 9.19 공동성명과 2.13 북핵 합의를 견인하는 디딤돌로 삼았다. 국익과 실용외교에 큰 비용 지불이 불가피하다는 얘기다. '생큐'나 ‘셰셰’로는 ‘회피할 수 없는 선택’의 해법이 될 수 없다. 모두와 잘 지낼 수 있는 외교는 가능하지 않다. 심지어 미국에 대해서도 그러하다.
정진황 논설위원실장 jhchu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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