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G는 없다, 시간만 있다”.. 가장 낯선 몰입, ‘서귀’가 만들어낸 공간

제주방송 김지훈 2025. 5. 29. 14:06
음성재생 설정 이동 통신망에서 음성 재생 시 데이터 요금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글자 수 10,000자 초과 시 일부만 음성으로 제공합니다.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실사로만 완성한 ‘서귀’.. 몰입형 미디어아트, 새로운 감각을 열다
“서귀(Purgatory), 그곳은 현실이자 연옥.. 감각과 존재가 겹쳐지는 경계”
빛의 벙커 ‘서귀’ 전시 제작 과정 이미지(장민승 작가 제공)


# 더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덜어낼 수 있을까.
얼마나 조용히, 얼마나 멈춰 서게 만들 수 있을까.

무엇을 감추는가가 아닌, 무엇이 남는가를 묻는 감각.
‘몰입’이라는 이름으로 지나쳐온 것들을 다시 마주하게 만드는 전환의 감각.

그 질문이 지금, 가장 어둡고 조용한 공간에서 다시 시작을 말합니다.
규명되지 않는 자연, 해석되지 않는 예술이 조용히 관객을 끌어당깁니다.


국내 최초 몰입형 복합문화예술공간 ‘빛의 벙커’는 장민승 작가의 ‘서귀(西歸·Purgatory)’ 전을 몰입형 예술 전시로 선보인다고 29일 밝혔습니다.

■ ‘서귀’, 지명이자 상징.. 현실이자 경계

‘서귀’는 제주의 지명이면서 동시에 존재론적 어떤 ‘상태’를 지칭합니다.
‘서쪽으로 돌아감’이라는 문자적 의미는 해가 지는 방향, 죽음과 귀환, 그리고 정화의 공간인 ‘연옥(Purgatory)’이라는 종교적 개념과도 연결됩니다.

장소명일 뿐만 아니라 시간과 감각, 존재의 조건이 교차하는 상징으로 의미망이 확장됩니다.

작가는 이 낯선 개념을 영상 언어로 치환해 관객 앞에 펼쳐놓습니다.
자연은 관객을 응시하고, 어느새 관객은 ‘보는 자’에서 ‘보이는 자’로 자리를 옮겨 감각의 흐름에 몸을 맡기게 됩니다.

내년 2월까지 진행되는 ‘칸딘스키, 추상 회화의 오디세이’ (‘빛의벙커’)


■ 실사의 미디어, 시간으로 구성한 몰입

이번 전시는 CG와 합성, 시뮬레이션을 철저히 배제하고 실사만으로 구성됐습니다.

작가는 수년간 제주의 바위, 물길, 숲, 오름 등을 직접 촬영했으며, 내러티브 없이 존재 그 자체를 보여주는 화면 앞에서 관객은 멈춰 서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영상은 스크린을 넘어 공간이 되고, 그 공간은 연옥처럼 아직 머물러야 하는 감각의 중간 지대로 관객을 이끕니다.

■ 정재일의 사운드, 공간을 다시 빚다

전시의 감각적 밀도를 완성하는 것은 사운드입니다.
영화 ‘기생충’, 드라마 ‘오징어 게임’ 등의 음악을 맡았던 정재일 음악감독이 참여해, 멜로디와 리듬을 최소화한 공간형 사운드를 설계했습니다.

클래식과 영화음악, 국악 등 장르를 넘나들며 활동해온 정 감독은 이번 전시에서도 사운드가 공기인 듯 전시장 전체를 감싸도록 설계하면서, 시청각 경계를 허물어 관객의 감각을 보다 깊은 몰입으로 이끕니다.

내년 2월까지 진행되는 ‘파울 클레, 음악을 그리다’ (‘빛의벙커’)


■ CG의 교란도, 영상 잔치도 없이.. 실사의 선언

‘서귀’는 CG와 스펙터클 중심의 디지털 전시 문법을 벗어나 실사만으로 몰입을 구현한 전시입니다.

이 전시는 덜어냄이라는 방식으로 질문을 던지며, 영상은 침묵하고 관객은 멈춰 서며, 감각은 그 틈에서 깨어납니다.

‘빛의 벙커’는 더 이상 ‘빛’만을 투사하지 않으며, 그 공간은 이제 시간과 정화, 감각을 초대하고 스펙터클에서 사유로, 감각의 소비에서 응시로 이동합니다.

‘서귀’는 미디어아트의 윤리를 다시 묻는 작업으로 자리합니다.

■ 작가의 의도, “덜어냄의 윤리로 감각을 묻다”

장민승 작가는 가장 깊은 몰입은 현실적인 것으로부터 출발한다고 보고, 영상이 말을 멈추고 관객이 그 앞에 조용히 멈춰 설 때 비로소 감각이 깨어난다고 설명합니다.

우리가 ‘본다’고 믿어온 감각이 무너진 자리에 설명되지 않은 감정과 정제되지 않은 시간이 남는다면서 ‘서귀’는 빛을 투사하는 공간이 아니라 감각이 머무는 장소로, 더 많이 보여주기보다 덜어냄으로써 사유의 공간을 여는 작업이라고 말합니다.

오는 6월말까지 진행되는 ‘이왈종, 중도의 섬 제주’(‘빛의벙커’)


■ 전환의 공간, 새로운 미디어아트를 열다

운영사인 ㈜티모넷의 박진우 대표는 ““‘서귀’는 기술이 아닌 실제의 시간과 장소를 미디어화한 실험”이라며, “(이번 전시는)몰입형 콘텐츠가 감각적 성찰의 예술로 진화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계기가 될 것”으로 내다봤습니다.
이어 “몰입형 예술 공간이 동시대 창작자의 시선을 감각적으로 풀어내는 새로운 예술 플랫폼으로 자리매김하기를 기대하며, 이를 위해 지속 노력할 것”이라고 덧붙였습니다.

이 전시는 관객에게 무엇을 보라고 강요하지 않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그 자리에 잠시 멈춰 서 보기를 조용히 제안합니다.
그 공간은 ‘제주’일 수 있고, ‘연옥’일 수 있으며, 어쩌면 지금 이 순간 관객 자신의 내면일 수도 있습니다.

전시는 끝나지만 감각은 남습니다.

그리고 그 감각은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고, 오직 관객 자신의 세계로 남습니다.
그것이야말로 ‘서귀’가 건네는 가장 작고도 가장 낯선 몰입일지 모릅니다.

전시는 오는 7월 중 개막할 예정입니다.

‘서귀’ 전은 제주콘텐츠진흥원이 주관한 2025년 지역문화산업연구센터(CRC) 지원사업 선정작입니다.

보다 자세한 관람 정보는 ‘빛의 벙커’ 공식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한편, 서울 워커힐 호텔 내 몰입형 미디어아트 전시관 ‘빛의 시어터’에서는 국내 작가 이응노를 조명하는 전시 ‘이응노: 위대한 예술적 여정, 서울–파리’를 오는 10월 31일까지 연장 운영할 예정입니다.

JIBS 제주방송 김지훈(jhkim@jibs.co.kr) 기자

Copyright © JIBS.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