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압 피하려 발전한 상징과 은유… 세계가 이란 영화 주목하는 이유

백수진 기자 2025. 5. 29. 0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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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잡 시위 다룬 칸 영화제 수상작
‘신성한 나무의 씨앗’ 내달 3일 개봉
수사판사 이만(가운데)은 두 딸이 히잡 시위에 휘말릴까 노심초사하며 딸의 일거수일투족을 통제하려 한다. 영화 ‘신성한 나무의 씨앗’에 출연한 뒤 이만 역을 맡은 배우 미사그 자레는 출국 금지를 당해 칸 영화제에 참석하지 못했다. 두 딸을 연기한 배우들은 이란을 떠나 독일로 망명했다. /그린나래미디어

2022년 이란 테헤란의 에빈 교도소에는 두 정치범이 수감돼 있었다. 한 명은 ‘심플 액시던트’로 올해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은 자파르 파나히 감독. 또 한 명은 그의 절친한 동료이자 지난해 ‘신성한 나무의 씨앗’으로 칸 영화제 심사위원 특별상을 받은 모하마드 라술로프 감독이었다. 라술로프는 정부 비판 서한에 서명했다가 선동 혐의로 체포당해 수감됐고, 파나히는 라술로프 감독 석방을 요구하다 본인도 구속됐다. 두 감독은 교도소에서 대규모 히잡 반대 시위를 지켜봤고, 이때 경험은 각각 ‘심플 액시던트’와 ‘신성한 나무의 씨앗’에 영감을 줬다.

그래픽=김성규

2022년 이란의 ‘히잡 시위’(히잡을 제대로 착용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경찰에 잡혀간 여성이 의문사하면서 촉발된 시위)를 다룬 영화 ‘신성한 나무의 씨앗’이 다음 달 3일 개봉한다. 테헤란의 혁명 법원에서 시위대에 사형선고를 내리는 수사 판사 ‘이만’은 죄책감을 느끼면서도 그만둘 용기는 없다. 어느 날 집에 뒀던 총이 사라지고, 이만은 아내와 두 딸을 의심한다. 자유와 변화를 요구하는 젊은 세대와 이들을 통제하려는 정권의 갈등을 한 가족의 분열에 빗댄 심리 스릴러. 휴대전화로 촬영한 실제 시위 장면을 영화 곳곳에 담아 현실감을 더한다.

‘심플 액시던트’와 ‘신성한 나무의 씨앗’을 수입한 그린나래미디어는 “이란에서는 정권의 감시를 피해 여러 사회문제를 다루면서 오히려 창의적인 이야기와 다양한 연출 방식을 보여주는 영화가 나오고 있다”고 했다.

올해 칸 황금종려상 수상작 '심플 액시던트'. 우연한 사고로 만나게 된 남자를 예전에 자신을 괴롭힌 고문관으로 확신하면서 벌어지는 복수극이다. /칸 국제영화제

이란은 정치적·종교적 탄압 속에서도 꾸준히 독창적인 영화가 나오고 있다. 이란 영화가 세계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의 작품들이 국제 영화제에서 반향을 일으킨 뒤다. 1997년 ‘체리 향기’는 종교적으로 금기가 된 주제 ‘자살’을 철학적으로 다뤄 이란 역사상 최초로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았다.

검열을 피하기 위해 은유나 상징을 활용해 우회적으로 표현하는 방식이 오히려 예술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이란 영화를 국내에 꾸준히 소개해 온 부산국제영화제 박성호 프로그래머는 “이란 사람들은 일상에서도 시적이고 은유적인 표현을 즐겨 쓴다”면서 “영화에서도 검열 대상이 되기 어려운 비유적 표현을 많이 사용하고, 다양한 촬영 기법을 활용해 인간의 심리를 탁월하게 묘사하는 작품이 많다”고 했다.

대규모 상업 영화를 만들기 어렵기 때문에 독립·예술 영화가 더욱 발전한 측면도 있다. 이란 영화는 대부분 저예산으로 제작하며, 소규모 제작진과 비전문 배우를 기용해 현실적 문제를 다루는 작품이 많다. 검열이 비교적 느슨한 단편 영화가 발달해 신인 감독의 등용문 역할도 해왔다. 이란의 테헤란 국제 단편 영화제는 지난해 작품이 1만5000편 이상 출품돼 단편 영화제 역사상 최다 기록을 세웠다.

영화 '신성한 나무의 씨앗' /그린나래미디어

가짜 시나리오를 만들어두고, 영화가 담긴 USB를 밀반출하는 등 그 자체로 영화 같은 제작 과정도 주목받는다. 지난해 국내 개봉한 자파르 파나히의 ‘노 베어스’는 이들의 목숨을 건 영화 제작 과정을 엿볼 수 있는 작품. 출국 금지를 당한 감독이 국경 마을에 머물며 원격으로 촬영을 진행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로 파나히 감독 본인이 출연했다.

‘신성한 나무의 씨앗’ 역시 정부의 허가를 받지 않고 몰래 촬영하고, 국영방송인 척하는 등 갖은 방법을 동원해 영화를 완성했다. 이후 라술로프 감독은 여배우에게 히잡을 씌우지 않았다는 이유 등으로 징역 8년형과 태형, 재산 몰수형을 선고받고 독일로 망명했다.

영화 제목은 감독이 이란 남부의 섬에서 본 인도보리수에서 땄다. 이 나무의 씨앗은 다른 나무에 떨어져 뿌리를 내리고, 숙주 나무를 휘감아 자라 결국 질식시킨다. 히잡을 벗어던진 여성들은 이란 사회에 변화의 씨앗을 심었다. 이란의 감독들이 계속해서 영화를 만드는 일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라술로프 감독은 파나히 감독의 황금종려상 수상을 축하하며 “수년간 이어진 노력, 인내, 저항 끝에 이슬람 공화국의 공허한 검열 체계를 밀어낸 데 대해 매우 기쁘게 생각한다. 오늘 이란의 ‘검열을 거부하는 영화’는 더 단단한 기반 위에 서게 됐다”고 축사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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