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을 체험한 자에게 사랑의 길 다시 물으며
번지 없는 땅에서도 가릴 것은 가려서 피던
무정란 하나를 품고 행복한 듯 웃던 그대
고고한 꽃대 하나가 고추선 채 마른다
이별을 체험한 자에게 사랑의 길 다시 물으며
부귀영화 다 버리고 낮은 곳으로 내려와서야
비로소 사람을 만났네, 살아 참말 좋았네
한달 째 곡기를 끊고 한쪽 벽만 바라보던
불을 켜도 불을 꺼도 숨소리 여전하던
뼈뿐인 한란 한 촉이 목걸이를 내릴 때
한 송이 풍전등화 스위치가 내려지고
수그린 모가지에 검은 빛이 서리면서
천만 근 꽃의 침묵이 무덤처럼 놓이고
거짓말 않기 위해 사랑하지 않으리라
질투하지 않기 위해 사랑하지 않으리라
골똘히 장고를 접고 향기마저 거두는
사람이 사람에게 마지막 거는 믿음
정의 진실 그리고 사랑…, 어느 쪽에 꽃은 설까
시드는 꽃송이 앞에 내 고개가 꺾이고
시인의 사냥터에 까투리 한 마리 떨어져
동서남북 상하좌우 그가 쏜 화살을 품고
하늘에 목을 바친 채 몸만 내려 누웠다
거친 듯 부드럽고 따스한 듯 식어가던
어머니 임종 직후 손마디가 이러했지
자는 듯 오무린 꽃술에 줄무늬만 남긴 채
세 차례 꽃 피워도 사랑한 번 못해본 너
사원 아닌 사원에서 한 하늘만 섬겼던 너
검정색 수녀복 두 벌이 마디마디 걸렸다
어쩐담, 둘째 녀석도 푸른 깃을 접고 있네
며칠 째 금식 중인 빼빼마른 목덜미 위로
연초록 미립자들이 바삐 빠져나가고
여덟 잎 난을 치다 가만 붓을 놓으시고
돌연 안색 바꾸시고 설한풍 뿌리는 하늘
초연히 막내 혼자서 꽃의 임종을 보고 있다. <계속>
/2004년 고정국 詩
#시작노트
세상의 모든 동물은 사람의 겉모습을 닮았고, 세상의 모든 식물은 사람의 내면을 닮았다는 것이 바로 민들레한테 배운 이른바 민들레 필법인 셈입니다. 그래서 학교나 책에서 뛰쳐나와 자연과 철부지 대화를 나눈 것이 오늘 여기 「난의 소등」의 두 번째 내용입니다.
산문이든 운문이든 저는 민들레에게서 배운 필법으로 나에게 다가온 대상들과 접근해 나간답니다. 지인에게서 선물 받은 난 화분에서 3년 만에 꽃을 피운 그 난초가 삼십팔일 간의 개화기간을 마치고, 시들어가는 표정에서 읽어냈던 장시조를 이번 두 번째로 옮겼습니다. 무엇보다 시는 제목을 설명하는 주관식 모범답안지가 아니라는 신념에는 변함이 없음을 고백합니다.

▲ 1947년 서귀포시 남원읍 위미 출생
▲ 1972~1974년 일본 시즈오카 과수전문대학 본과 연구과 졸업
▲ 198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
▲ 저서: 시집 『서울은 가짜다』 외 8권, 시조선집 『그리운 나주평야』. 고향사투리 서사시조집 『지만울단 장쿨레기』, 시조로 노래하는 스토리텔링 『난쟁이 휘파람소리』, 관찰 산문집 『고개 숙인 날들의 기록』, 체험적 창작론 『助詞에게 길을 묻다』, 전원에세이 『손!』 외 감귤기술전문서적 『온주밀감』, 『고품질 시대의 전정기술』 등
▲ 수상: 제1회 남제주군 으뜸군민상(산업, 문화부문), 중앙시조대상 신인상, 유심작품상, 이호우 문학상, 현대불교 문학상, 한국동서 문학상, 한국해양문학상 등
▲활동: 민족문학작가회의 제주도지회장 역임. 월간 《감귤과 농업정보》발행인(2001~2006), 월간 《시조갤러리》(2008~2018) 발행인. 한국작가회의 회원(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