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의 글씨란 기교가 아니라… 세상을 위해 나를 버린 사람의 글씨

허윤희 기자 2025. 5. 27. 0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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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서화와 50년 함께한 김영복 문우서림 대표
명작 80점 엄선한 ‘옛것에 혹하다’ 펴내
안중근, ‘세심대’. 1910년. 붓이 아닌 칼로 내리그은 것 같이 서늘한 기운에 압도된다. 개인 소장. /돌베개

김영복(71) 문우서림 대표는 2006년 4월 2일을 잊지 못한다. 서울 인사동에서 잔뼈 굵은 그가 KBS ‘TV쇼 진품명품’ 감정위원으로 출연한 지 1년쯤 됐을 때다. 소실된 것으로 알려진 다산 정약용의 ‘하피첩’ 실물이 이날 방송을 통해 공개됐다. 다산이 강진으로 유배 갔을 때 아내 홍씨가 보내온 치마를 잘라 두 아들과 손자에게 주는 당부를 적은 서첩이다.

“의뢰인은 이게 얼마나 대단한 유물인지 모르고 스튜디오에 도착했습니다. 소장 내력도 놀라웠지요. 2년 전 파지를 수집하는 할머니의 수레에 있던 서첩을 의뢰인이 경기도 수원 공사장 파지와 바꿨다는 겁니다. 이날 ‘하피첩’ 감정가를 1억원으로 평가했더니, 의뢰인이 너무 놀라서 운전도 제대로 못 했다고 해요.” 소장자는 이후 어려운 경제 사정으로 작품을 시장에 내놓았고, 지금은 국립민속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다산 정약용, '하피첩' 일부. 1810년.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돌베개

‘인사동 터줏대감’ 김영복 대표가 고서화와 함께한 50년을 돌아보는 첫 책 ‘옛것에 혹하다’를 펴냈다. 1975년 고서점 통문관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해 ‘걸어다니는 고미술 사전’으로 통하는 지금에 이르기까지, 몸으로 부딪치고 눈과 귀로 익힌 고서화 이야기가 진득하게 펼쳐진다. 표암 강세황, 진재 김윤겸의 서화 등 ‘구로도무끼’(볼수록 매력적인 작품을 뜻하는 골동 상인들의 은어)부터 “우리 역사상 최고의 예술가”라 칭하는 추사 김정희를 비롯해 만해 한용운과 안중근 글씨까지 명작 80점을 엄선해 소개한다.

소문난 추사 마니아인 그도 가짜에 속아 산 일이 있었다. “월급 5만원 받던 시절, 6개월을 모아 가불받고 주변에서 꾸고 해서 추사 글씨를 샀어요. 어찌나 기분이 좋던지 하늘을 나는 것 같았지요.” 며칠 후 인사동 식당에 대가들이 모여 있다길래 의기양양 추사 글씨를 꺼냈더니 그들 표정이 묘했다. 가짜를 샀다는 걸 알고 분통해한 그는 이후 추사 글씨라면 눈에 불을 켜고 뜯어보고 연구했다.

서울 인사동 부남빌딩 문우서림에서 만난 김영복 대표. 고서화와 함께한 50년을 돌아보는 첫 책을 펴냈다. /김지호 기자
진재 김윤겸, '농수정'. 18세기. 개인 소장. /돌베개

“골동을 사려면 우선 ‘눈 밝은’ 고수를 많이 알아야 해요. 첫 단계부터 너무 비싼 걸 사면 안 됩니다. 한두 번 잘못 사면 상처가 오래가거든요. 좋은 수장가가 그래서 그만두는 경우가 많아요. 저는 고미술품 처음 수집하는 사람에게 세 가지를 말합니다. 첫째, 먼저 사람에게 배워라. 둘째, 공부를 시작해라. 셋째, 작품 그 자체를 믿어라. 이걸 반복하다 보면 실수를 점점 덜 하게 돼요.”

추사가 쓴 '계산무진'. 165.5×62.5㎝. 우에서 좌로 서서히 올라가다 뚝 떨어지는 리듬, 비우고 채우는 공간 경영이 돋보인다. /간송미술관

그는 “추사 김정희는 몇 마디 짧은 문장으로 요약할 수 없는 대학자이자 예술가”라며 대표적인 글씨로 ‘계산무진(谿山無盡)’을 꼽았다.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서서히 올라가다가 뚝 떨어지는 리듬, 비우고 채우는 공간 경영이 돋보인다”며 “글자의 공간 구성에 한 치의 틈이 없다”고 했다.

김영복 대표는 "지금은 미술품을 구입할 때, 아무리 전문가의 조언을 들었다 할지라도 남의 말은 참고만 할 뿐 마지막 결정은 스스로 한다"며 "스스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때가 미술품을 정확히 읽을 수 있는 때"라고 했다. /김지호 기자

“제가 생각하는 잘 쓴 글씨는 유명한 서예인이 쓴 글씨죠. 좋은 글씨는 부모와 스승의 글씨, 내가 존경하는 분의 글씨 같은 것이고요. 그보다 더 좋은 글씨, 가장 좋은 글씨는 남을 위해서, 세상을 위해서 살다 간 분들의 글씨입니다. 그런 면에서 안중근 의사의 유묵은 최고의 기술을 지닌 서예가도 따라가기 어려운, 좋은 글씨의 표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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