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일 ‘광주’ 진압 직후 헬기까지 출동… 전주 신흥고 시위 아시나요
시내진출 좌절 학교 운동장 돌며 "독재타도 민주수호"
착검 계엄군, 장갑차, 헬기까지 동원해 학교 겹겹 봉쇄
27명 정학, 퇴학에 구속…교정에 ‘오이칠 정’세워 뜻 기려

45년전, 1980년 5월27일 오전 5시10분.
10일간의 장엄한 5ㆍ18 항쟁은 막을 내렸다.
3공수여단 특공조 80명이 4시5분에 최후항쟁지 전남도청을 접수했다. 7공수 262명은 4시23분 광주공원과 시내 일원을, 11공수 37명은 전일빌딩을 공격했다.
민주의 새벽을 지킨시민군 17명이 현장에서 숨졌다. 겨우 살아남은 295명은 두손이 묶인채 피범벅으로 끌려 나왔다. 전두환 신군부에 맞서 총을 들고 저항했던 광주는 패배했다. 주먹밥을 나누고, 피가 부족하면 헌혈했던 광주는 그날 새벽 깊은 침묵에 빠져들었다.
'광주'가 진압된 지 4시간이 지났다. 전주 한 고등학교에서 거센 함성이 터져 나왔다. "독재타도 민주수호" "전두환은 물러가라" "계엄해제" 1교시가 시작될 무렵이니 오전 9시쯤 됐을까. 전주 신흥고등학교 전교생이 운동장으로 쏟아져 나왔다.
학생들은 각 반별로 스크럼을 짜고 교문으로 내달렸다. 3학년들이 맨 앞에 섰다. 뒤를 이어 2학년, 1학년이 따랐다. 유인물이 허공에 뿌려졌다. 학교 교회 고등부실에서 몰래 등사판으로 1천부를 만들었다.

교문은 이미 폐쇄됐고, 착검한 계엄군이 출동했다. 교문을 겹겹으로 에워쌓다. 학교 울타리도 모두 포위했다. 갑자기 헬기 굉음이 운동장에 진동했다. 헬기가 저공비행하면서 학생들을 위협했다. 장갑차도 보였다. 여차하면 교문을 밀고 들어 올 태세였다.
학생들은 시내 진출이 좌절되자 운동장을 돌았다. 그날은 참으로 더웠다. 어깨동무를 하며 구호를 외쳤다. 땀범벅이 됐다. 학생들은 탈진하고, 일부는 쓰러지기도 했다.
선생님들의 설득으로 강당에 모였다. "왜 우리가 일어나야만 했는가"를 주제로 자유발언을 이어갔다. 해가 지고 어스름한 저녁까지 계속됐다. 계엄군은 여전히 학교를 봉쇄했다. 교사들의 끈질긴 설득으로 계엄군이 철수했다. 3~4명씩 조를 짜서 하교를 했다.

그날 후 30년이 흘렀다. 시위를 주도했던 3학년(81회)들은 졸업 30주년을 맞아 지난 2012년 교정에 작은 정자와 기념비를 세웠다. 정자 이름을 시위 날짜를 기념해 '오이칠 정'으로 지었다. 기념돌에 '오이칠 정을 세운 뜻'을 새겼다.
전주 신흥고 학생들의 시위는 광주 진압 후 처음으로, 광주의 진실을 알린 저항이었다. 더욱이 고교생들이 착검한 계엄군, 장갑차, 헬기에 맞서 거리 진출을 시도한 조직적인 항쟁이었다. 고교생 시위로는 유일했고, 처음이었다.

그날 시위를 벌이다 정학, 퇴학, 구속된 27명은 어떻게 됐을까.
김병호 신흥고 교장은 "5ㆍ.27신흥민주화운동으로 고초를 겪었던 학생들은 대부분 졸업을 했거나, 명예졸업장을 받았다"면서 "다만, 지난해 단 2명이 명예졸업장을 못받았다가 1명은 전수했지만, 1명은 행방을 알 수 없다"고 말했다.
신흥고는 매년 그날의 시위를 기념하는 행사를 벌이고 있다. 지난 21일 열린 기념행사에는 당시 주역인 선배가 참석해 특강을 했으며, 그 때 뿌려진 호소문을 재학생 대표들이 낭독했다. 또 전주KBS가 촬영했던 1분 가량의 시위 영상을 시청하며 뜨거운 민주정신을 공유하기도 했다.
지난 2016년부터는 5.ㆍ18 당시 재학생이던 동문들이 기금을 모아 '5월 신흥민주화 운동 기념 글쓰기 대회'를 열고 있다. 올해 10번째 시상식을 가졌다.
신흥고 출신은 강택구 광주효동초교 교장은 "학창시절 5월이 되면 선생님들이 그날의 시위 얘기를 늘 해주었다"면서 "재학생 때는 잘 몰랐지만, 늘 5ㆍ.27시위가 우리들의 마음에 자리잡고 있었다"고 전했다.
광주 항쟁은 결코 끝난 게 아니었다. 전주 신흥학교 학생들이 4시간 후 다시 움켜 쥔 '광주'는 45년이 지나 내란 종식의 들불로 다시 타오르고 있다.
'광주'는, 그날 전주 신흥고 학생들을 영원히 기억하리라.
/이건상 기자 lgs@namdo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