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처럼 농익은 50년의 기타 선율...팻 메스니, 9년 만의 내한

윤수정 기자 2025. 5. 26. 17:33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공연 중 42현 피카소 기타 연주를 선보인 팻 메스니. /프라이빗커브

“전 잘 세보지 않아 몰랐지만 누군가 제게 지금까지 앨범을 ‘53장’ 냈다고 말해주더군요. 오늘 밤 공연은 저의 솔로 음악 여정을 돌아보는 기회입니다. 다양한 음악으로 채우겠습니다.”

지난 23일, 서울 서초구 GS아트센터 무대에 선 미국 재즈 기타리스트 팻 메스니(71)는 마치 다큐멘터리 내레이션과도 같은 담담한 어투로 공연 문을 열었다. 미국 최고 권위의 음악상 그래미상을 20차례나 수상한 전설적인 재즈 기타의 거장. 그중 절반은 자신이 주축이 된 ‘팻 메스니 그룹(PMG)’으로, 절반은 각종 솔로 활동과 실험적인 음악들로 거머쥔 천재적인 음악가. 그 경력에 비춰본다면 다소 겸손하다 못해 밋밋하게 느껴지는 소개였다.

그러나 그가 자신의 상징과도 같은 42현 기타를 꺼내 ‘Into The Dream’을 연주하는 순간, 그의 소개에 실린 무게가 묵직하게 변모했다. 캐나다의 여성 기타 명장 린다 맨저가 메스니의 요청으로 특별 제작한 이 기타의 별칭은 ‘피카소(Pikasso)’. 일반적인 기타에 하나 달린 넥 부분을 네 개까지 늘린 것으로, 극도로 명징한 소리를 낸다. 이날 연주에선 메스니가 작곡한 동양적인 선율이 더해지면서 서양식 하프와 중국식 고토를 오가는 오묘한 소리 중심을 뽐냈다. 이 곡을 연주하기 직전 메스니가 ‘Zero Tolerance For Silence Part 10’의 파괴적인 연주를 선보인 것도 피카소 기타의 청량함을 극대화했다. 바리톤 기타의 현을 긁어낸 ‘끼기긱’ 소리를 루프스테이션(여러 소리를 녹음해 쌓아올리는 화음 장비)으로 중첩시키며 ‘소음(Noise) 시리즈’란 수식어를 얻은 그의 대표작이다. 그의 손이 바리톤 기타에서 피카소 기타로 옮겨가는 순간, 마치 지옥의 아우성으로 돋은 소름을 천국의 화음으로 지워내는 듯한 기분을 만끽할 수 있었다.

/팻 메스니 공식홈페이지부스스한 중단발의 사자머리는 수십 년간 그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9년 만에 다시 한국을 찾은 그는 밝은 갈색이던 머리카락이 백발로 변해 있었지만, 기타 이야기를 할 때마다 아이처럼 신이 난 얼굴과 뛰어난 연주 실력은 여전히 변함이 없었다.

메스니의 이번 단독 공연은 지난 23~25일, GS아트센터 개관 기념과 2025서울재즈페스티벌의 전야제 성격으로 열렸다. 9년 만의 내한으로 주목받았지만, 다소 매진 행렬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 스스로도 “오랜 세월 공연했지만 이번처럼 혼자 무대에 올라 공연 전체를 이끄는 투어는 처음”이라고 소개했을 만큼 낯선 공연 방식 때문이다. 그가 공연명으로 붙인 ‘Dream box/MoonDial Tour’는 최신 앨범명들에서 따온 것인데 주로 어쿠스틱 독주에 주력한 앨범들이다. 약 2시간을 다른 악기나 보컬 조력 없이 기타 독주로만 채우는 건 연주자에게도, 관객에게도 쉽지 않은 도전. 그보다 앞선 20일에는 재즈 피아니스트 브래드 멜다우가 정상급 재즈 베이시스트 크리스천 맥브라이드·드러머 마커스 길모어와 함께 국내 선보인 적 없는 트리오 구성으로 같은 무대에 섰다. 동일한 기획 공연으로 무대 관객층이 겹치는 상황에서 상대적으로 멜다우 팀에 이목이 쏠렸다.

그러나 기타 독주의 한계를 철저히 깨버린 메스니의 연주는 사흘간 공연장을 나서는 관객들에게 “안 왔으면 큰일 날 뻔”을 입버릇처럼 되뇌이게 만들었다. 메스니는 첫날 공연 중 “형도, 아버지도, 할아버지도 트럼펫 연주자인 집안에서 8세 때부터 트럼펫을 시작했던” 자신이 기타로 전향한 결정적 이유로 “사람마다 상상하는 소리가 다른 악기라고 깨달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 말을 증명하듯 자신의 대표 그래미 수상작인 ‘Beyond the Missouri Sky’를 비롯해 재즈 스탠더드 곡 ‘Girl From Ipanema’를 재해석할 때도 대중적인 멜로디의 원형은 해치지 않는 동시에 쉽게 상상하기 어려운 기타 코드들을 불쑥불쑥 들이밀었다.

그의 이번 공연은 특히 고급진 와인 시음회를 연상시켰다. 유명 빈티지 와인의 색과 향에 밴 토양의 특성, 기후 등을 꿰뚫는 소믈리에처럼 한 곡이 끝날 때마다 자신이 사용한 악기의 특성과 쓰고자 했던 소리 질감을 세세하게 설명했다. 전자 기타의 몸체 빈 공간을 늘려 어쿠스틱 기타처럼 풍성한 소리를 내는 할로우 보디 기타, 일반 기타보다 음역대가 낮은 바리톤 기타, 피카소 기타, 일반 어쿠스틱 기타 등이 메스니의 손에서 저마다의 특장점을 개화했다.

메스니는 그중에서도 “수년간 바리톤 기타에 푹 빠졌다”며 “비올라, 바이올린, 첼로의 소리를 동시에 품고 있는 이 기타에 클래식 기타에 주로 쓰이는 나일론 줄을 끼웠다”고 했다. “그 질감을 만끽해 달라”며 연주한 곡들에서는 마치 바리톤 기타가 낡은 레코드판 속 콘트라베이스 같은 소리를 냈다. 여기에 때때로 메스니가 바리톤 기타의 줄을 긁어 낸 소리가 루프스테이션으로 중첩되면서 재즈 드럼처럼 박자를 잡았다. 혼자서도 뚝딱 트리오 연주를 완성하는 그 모습에서 메스니가 뛰어난 작곡가이자 수십 년간 다수의 재즈 프로젝트 리더로 살아온 사실이 상기됐다. 그는 이날 연주 도중 손이 아픈 듯 주먹을 자주 쥐었다 폈는데, “지난주 공연 차 찾은 중국에서 병원에 입원했다. 지금은 나았지만 거의 일주일 만에 처음 연주하다 보니 쥐가 난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그리 심각한 건 아니다. 난 손가락 하나만 남아도 연주할 수 있다”고 호언장담했다. 그 말이 결코 농으로만 들리지 않았다.

기계 장치에 의해 연주되는 악기 앨범 ‘오케스트리온’ 발표 당시의 팻 메스니./조선일보DB

가장 압권의 장면은 각종 소리 실험을 담아낸 곡 ‘Ochestrion’을 앙코르 곡으로 연주할 때. 메스니는 이 순서에서 공연 시작부터 자신의 뒤편에 마치 비밀 병기처럼 천막을 덮어 두었던 악기들의 정체를 공개했다. 천막을 벗길 때마다 실로폰에 연결된 기타, 드럼 하이햇 소리를 내는 두 대의 초소형 로봇 악기, 콘트라베이스 톤으로 조율해 둔 바리톤 기타, 섹시한 색소폰 소리를 내는 전자 기타 등이 속속 모습을 드러냈다. ‘자동 관현악기’란 곡명처럼 즉석에서 10분가량의 빅밴드 연주를 홀로 완성하는 그의 모습에 전석 기립 박수가 터졌다. 메스니가 무대를 떠난 후에도 한참 동안 여운에 잠긴 관객들이 공연장을 떠나지 않자 투어 스태프가 대신 등장해 메스니가 쓰던 기타 피크 수십 개를 나눠줬다.

메스니의 공연으로 전야제 막을 화려하게 내린 서울재즈페스티벌은 오는 30일부터 6월 1일, 사흘간 본격적인 축제에 돌입한다. 88잔디마당, KSPO DOME, SK핸드볼경기장, 88호수수변무대 등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 일대의 실내·외 무대에서 총 59팀이 연주 바통을 이어받는다.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