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속의 역사] (51) 원광법사의 탄생

원광은 신라 최초의 풍월주 위화랑의 아들 이화랑과 숙명궁주 사이에서 태어난 귀족 출신이다. 그의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그러했듯 동생 보리도 화랑 풍월주가 됐다. 그만 공부에 빠져 중국 유학길에 올라 유교에 이어 불교를 접해 뛰어난 지도자로 천년이 지나도록 그 이름이 전하고 있다.
원광법사는 신라 진평왕 당시 중국의 황제를 놀라게 할 정도로 문장이 뛰어난 승려로 신라의 왕실에서 중요한 문서를 담당하기도 했다.

◆신화설화: 화랑의 후예 원광
원광은 철저한 신라 화랑의 후예로 541년 태어났다. 신라 화랑의 초대 풍월주 위화랑의 아들인 이화랑은 만권의 책을 읽은 아버지로부터 직접 공부를 배우며 사서삼경을 읽고, 무술을 배웠다.
이화랑은 이사부와 지소태후의 딸인 숙명공주와 사랑을 나눴다. 당시 숙명궁주는 진흥왕의 왕비 신분이었다. 이화랑과 숙명궁주는 진흥왕에게 부적절한 관계가 드러나 죽음에 이르게 되었으나 지소태후와 이사부의 체면, 화랑세력의 위압감 등의 부담감을 안은 진흥왕으로부터 용서를 받고, 결혼을 허락받았다.

이화랑은 이 같은 상황에도 숙명궁주와 뜨겁게 사랑해 신라 삼국통일의 대들보가 된 원광과 보리를 낳았다. 원광은 어릴 때부터 제자백가의 학설을 독파하고, 사서삼경을 읽어 신동이라 불렸다.
원광은 화랑의 계보를 잇지 않고 공부에 매진하다 중국 유학길에 올라 결국 불교에 빠져들었다. 불교를 통해 전쟁의 참화를 잊고 마음의 안식처를 갈망해 피폐한 신라인들의 정신을 어루만지고 신라인들을 불교를 통해 구원하려 했다.
원광은 소승불교와 대승불교 양쪽의 경전을 모두 공부하고 진평왕의 간청으로 중국 황제의 허락을 얻어 신라로 귀국했다.
진평왕의 건의로 신라로 돌아온 원광은 왕명에 따라 걸사표를 지어 중국의 출병을 요청했다. 원광은 "자기가 살기 위해 남을 멸하는 것은 불교도의 행실이 아니지만 대왕의 땅에서 살고, 대왕의 땅에서 풀과 물을 먹고 있으니 어찌 감히 명을 거역할 수 있겠습니까"라며 걸사표를 지어 올렸다.

◆흔적: 운문사
운문사는 신라 진흥왕 21년(560년경) 한 이름 없는 고승이 현재의 운문사 터에 작은 암자를 짓고 3년간 수도한 뒤 창건한 사찰이다. 창건 당시 중앙에 세운 절을 대작갑사라고 불렀으며, 동·서·남·북 네 방면에 가슬갑사·천문갑사·대비갑사·소보갑사 등 네 암자를 함께 세웠다고 전한다. 이후 신라 진평왕 30년(608년)에는 원광법사가 이 사찰을 다시 중창했다는 기록이다.
후삼국 시대의 혼란으로 한때 폐허가 되었던 운문사는 고려 건국 후 937년(태조 20년)에 보양국사가 중창하고 절 이름을 작갑사라 했다. 943년 고려 태조 왕건은 보양국사의 공로에 보답하고자 이 사찰에 운문선사라는 이름을 내려 편액을 걸어주었고, 그때부터 운문사라고 부르게 됐다.
고려 숙종 10년인 1105년에는 원응국사가 3차 중창을 단행해 운문사가 당시 전국에서 두 번째로 손꼽히는 선종 사찰로 크게 발전하였다고 전한다.
13세기 후반 운문사는 불교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하기도 했다. 1277년(고려 충렬왕 3년)부터 고승 일연 대사가 5년간 운문사 주지로 머물면서 이곳에서 역사서인 '삼국유사' 집필을 시작했다. 이는 운문사가 고려 불교사뿐만 아니라 우리 역사 문화 측면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 장소임을 보여준다.

이후 1694년 내원암 중창을 비롯해 18~19세기에도 여러 차례 중수가 이루어지면서 사찰의 면모가 갖춰졌다. 현대에 들어서는 1954년 불교 정화운동을 계기로 운문사가 남성 승려 대신 비구니 스님들이 수행하는 도량으로 전환되었고, 이후 한국 불교 최대 규모의 비구니 사찰로 성장했다.
운문사에는 통일신라 시대부터 전해지는 다양한 석조 유물이 남아 있어 문화유산으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운문사의 중심 법당인 대웅보전은 조선 시대에 중창된 불전 건축물로, 현재 보물 제835호로 지정돼 있다. 내부에는 비로자나불을 모신 불단과 함께 관음보살·달마대사 벽화 등 소중한 불교 문화재가 봉안돼 있다.
금당 앞 석등(보물 제193호)은 8각 형식의 통일신라 석등으로서 운문사 금당 터를 밝혀온 유물이며, 동·서 삼층석탑(보물 제678호)은 통일신라의 전형적인 삼층 석탑 2기가 대웅보전 앞을 지키고 있다. 이와 함께 석조여래좌상(보물 제317호)과 석조사천왕상(보물 제318호) 등이 현존해 오랜 불상 조각 전통을 보여준다.
운문사의 법당과 불화 유산도 눈길을 끈다. 조선 후기 건축 양식을 보여주는 대웅보전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17세기 중창 때 지어진 전각으로, 정면 3칸 규모의 다포식 건물이다. 이 법당 내부에는 비로자나불 삼신불회도(보물 제1613호)와 관음보살·달마대사 벽화(보물 제1817호) 등 귀중한 불화가 봉안돼 있다. 특히 관음보살과 달마대사를 한 화면에 나란히 그린 운문사 벽화는 국내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독특한 사례로 17세기 후반에 제작된 작품이다.
이 밖에도 고려 시대 고승 원응국사비(보물 제316호)와 같은 석비 유물이 남아 있어 사찰의 역사를 전해준다. 또한 운문사 처진소나무는 수령 500년으로 추정되는 아름드리 적송으로, 가지가 지면 가까이 축 처진 희귀한 생육 상태 때문에 천연기념물 제180호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다.

◆스토리텔링: 안개 속의 원광법사
원광법사는 신라 중흥기 진평왕 당시 국정에 깊숙이 관여했던 고승이다. 특히 신라 삼국통일의 기초가 됐던 불교와 화랑이라는 두 가지 열쇠에 영향을 미친 삼국통일의 일등 공신으로 꼽힐 정도다.
이 같은 공적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출생과 입적에 대한 기록은 너무나 허술하다. 출생에 대해 언급한 자료는 찾아보기 어렵고, 입적에 대한 이야기는 99세 또는 84세 등 나이조차 터무니없이 다르게 나타나 그의 흔적은 안개 속이다.

수이전은 또 원광법사의 도력을 나타내면서 여우가 신의 목소리로 원광에게 후세에 서로 계를 주기로 약속하는 장면을 그려 신비롭다.
중국의 황제를 감복하게 하는 글 솜씨로 진평왕은 원광을 곁에 두고 나라의 대내외적인 문서는 모두 그에게 맡길 정도였다. 원광은 또 운문선사에 있으면서 찾아온 화랑들에게 수련의 지침이 될 세속오계를 내려 수천 년이 지난 지금에까지 청년들의 나침반이 되고 있다.
지금은 경주 금곡사의 부도탑을 원광법사의 흔적으로 이해하고 학자들도 학생들과 함께 답사하고 있다.
*이 글은 문화콘텐츠 육성을 위해 스토리텔링 한 것이므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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