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국의 심심(心心)파적 <70>] 우리가 남이가?: 동일성의 심리학

김진국 문화평론가 2025. 5. 26. 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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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음’이 아닌 ‘다름 속의 관계’를 추구하는 심리적 성숙이 우리 사회에 필요하다. / 사진 셔터스톡

곽경택 감독이 연출한 영화 ‘친구(2001)’는 부산 지역을 배경으로 조폭의 세계와 친구 사이의 의리를 다룬 영화다. 이 영화에는 어린 시절부터 죽마고우였던 준석(유오성 분)과 동수(장동건 분)가 어른이 돼, 각자 다른 조직에 몸을 담으면서 서로 적대적인 관계로 묘사된다. 이들 조직 간 갈등이 깊어지던 어느 날, 준석이 동수를 찾아간다. 당시 준석은 동수가 자신의 조직원을 다치게 했다는 이유로 격앙된 상태였다.

하지만 두 사람 사이에는 과거부터 얽힌 추억과 끈질긴 정이 남아있었기 때문에 선뜻 폭력으로 연결되지 않는다. 냉랭한 대화가 오가다가 준석이 갑자기 소리친다. “이기, 우리가 남이가? 우리가 남이가, 이 새끼야!” 동수는 쓴웃음으로 대신한다. “남이지. 니는 니 길 가고, 나는 내 길 가는 기라!” 영화는 오랜 친구였던 준석과 동수의 의리는 이미 끊어졌고, 두 사람은 돌이킬 수 없는 사이가 돼 버렸다는 것을 비극적으로 보여준다.

우리가 남이가? 이 여섯 글자에는 한국인의 정서와 사회 심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친밀감을 표현하는 말이지만, 때로는 차이를 견디지 못하는 ‘동일성’을 강요하는 힘으로도 작용한다. 이 말을 들으면, 한국적인 정서에서 의리·정·가족 등의 단어가 연상된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조폭 세계와 유사한 패거리 의식도 담겨있다. 공적인 일조차 사적인 차원에서 처리하려는 집단주의, 친밀감을 빙자한 공감 강요가 똬리를 틀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왜 이렇게 ‘함께’여야만 하고, 서로 ‘같아야’만 마음이 편한 것일까. 그 안에는 개인의 정체성, 집단의 기대, 전통의 유산 그리고 진화적 본능 등이 교차한다. 20대 후반의 여성 A는 60대 초반의 엄마랑 대화할 때마다 큰 벽을 앞에 둔 듯 답답함을 느낀다. A의 엄마는 A가 결혼 문제로 엄마와 다른 생각을 보일 때마다 이렇게 말한다. “가족끼리 어떻게 그럴 수가 있니, 우리가 남이야?” A는 이 말에 토를 달지 못한다. 논리가 아니라 정서적 연대를 기준으로 삼는 엄마 앞에서 A는 할 말을 잃는다.

이처럼 가족 내부에서조차 개별성을 인정하기보다 동일한 생각과 동일한 감정의 공유가 암묵적으로 요구된다. 다름은 곧 ‘정 없음’으로 받아들여지고, 의견 차이는 ‘배신’과 동의어가 된다. 내 의견은 틀리고, 가족의 의견만 맞다. 다른 것은 틀린 것이다. 이것이 가족이라는 관계를 이용한 심리적 압력의 출발점이다.

중소기업에 다니는 직장인 B는 너무 잦은 회식에 질려 몇 번 참석을 거절했다가 ‘팀워크를 깨는 사람’이라는 말을 들었다. 업무에는 아무 지장이 없지만, ‘같이 술을 마시지 않는 사람은 정이 없다’는 분위기가 그를 외롭게 한다. 극히 내향적인 성격에다 술도 잘 마시지 못해 회식 자리가 고역인 B에게는 여간 고통스러운 일이 아니다. 개성을 존중하기보다 집단에 어울리는 것을 우선하는 풍조를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속담이 잘 대변한다.

진화심리학에서 보면, 인간 뇌는 생존과 번식을 최우선 가치로 두는 환경에서 진화해 왔다. 선사시대 우리 인류는 작은 부족 단위로 생존했다. 그룹 내에서 협력과 동일성은 생존의 열쇠였다. 그 결과 우리는 자신과 유사한 가치, 신념, 외모, 행동 방식을 가진 사람에게 친밀성과 신뢰를 느끼도록 진화했다. 다른 의견이나 새로운 시도는 ‘위협’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유전적으로 강화됐을 것이다. 이러한 동질성 편향(homophily) 때문에 나와 다른 생각을 하는 자는 잠재적인 이탈자인 동시에 집단 생존을 위협하는 위험 요소라는 무의식적 인식이 생겼을 것이다.

‘우리’가 아니면 ‘남’이 되는 건 인류의 본능

집단의 흐름에 동조하지 않으면 ‘우리’가 아닌 ‘남’이 되는 구조, 그것은 인류의 본능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문화가 한국 사회에서는 더욱 두드러진 독특한 심리적 압력 중 하나이기도 하다. 조선시대 향촌 사회에서는 두레나 계, 향약 같은 공동체 구조가 강하게 작용했다. 개개인은 자신만의 개성적인 삶을 살아가기보다 공동체의 일원으로서만 행동해야 했고, 집단 규범에서 벗어나면 배척당하기 일쑤였다. 일손이 부족한 농경 사회에서는 모두가 협력해 농번기를 지내야 한다. 소속 집단을 최우선으로 여기는 분위기는 생존을 위한 전략의 일부였겠지만, 그런 구조는 지금까지도 ‘우리는 한마음, 우리가 남이가’라는 동일성 문화로 이어지고 있다.

김진국 문화평론가 - 현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교수

요즘 20~30대 젊은 세대조차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 소셜미디어(SNS)라는 새로운 장이 펼쳐졌지만, 새로운 마당에서도 동일성 신화는 계속된다. 이른바 ‘디지털 동일성’이다. 그들은 SNS에 유사한 해시태그, 비슷한 패션, 같은 장소 인증 샷을 공유한다. ‘남과 다르게 행동하면 외롭다’는 무의식은 젊은 세대에게도 여전히 유효하다. 디지털 시대의 우리가 남이가?는 팔로어의 규모와 ‘좋아요’ 숫자를 통해 작동한다.

최근 팬덤 정치가 일상화하고, 정치적 올바름(PC·Political Correctness)을 강요받는 트렌드는 개인이나 집단이 동일성에 대한 심리적 집착을 강화하는 주요 요인이 되고 있다. 이런 분위기에서는 개인이 집단적 가치, 신념, 태도에 무비판적으로 동조해야 한다는 압력이 강해진다. 팬덤 정치와 PC 문화는 ‘정답’을 공유하며 소속감을 형성하게 한다. 그래서 개인은 내면의 불안을 회피하기 위해서 동일한 언어·행동·정서를 반복적으로 수행하게 된다.

이런 과정을 에리히 프롬이 말한 ‘자유로부터의 도피’라고도 할 수 있다. 자유롭고 독립적인 존재가 되기보다 강한 동일성의 집단 안에 머무름으로써 안정감을 얻으려고 하는 것이다. 한 번의 클릭, 댓글조차도 기록으로 남는 SNS 시대에는 팬덤 정치와 PC 문화에서 오는 동일성 압력이 더욱 가중된다. 우리와 동일한, 그래서 ‘올바른 태도’와 우리 집단의 의견에 부합하는, 그래서 ‘정확한 표현’이 강조되기 때문이다. 개인은 자신의 독립적 사고보다는 타인의 승인과 동일성을 우선시하게 되는 것이다.

멀리 갈 것도 없다. 수십 년을 알아 온 친구나 선후배 사이에서도 오직 특정한 정치 지도자나 소속 정당에 대한 지지나 선호도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친밀한 교류는 순식간에 사라진다. SNS 같은 온라인상에서 ‘친구 삭제’나 ‘차단’은 흔히 일어나는 일상사가 되지 않았는가. 부자지간, 직장 동료끼리도 의견이 갈리면 냉랭해진다. 화기애애한 친선 모임에서도 얼굴을 붉히거나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리는 일을 심심찮게 목도한다. 이런 경험을 이른바 ‘조국 사태’, 비상계엄으로 야기된 ‘탄핵 정국’에서 직간접적으로 접한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다.

불과 몇 달 전에 나도 매우 황당한 일을 겪었다. 대학 같은 학과 동기생이 모인 카톡방에서 일어난 일이다. 몇몇 친구가 탄핵에 대한 자기 의견을 직설적으로 강하게 표현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들 의견에 반대하는 친구가 이를 지적하고 나섰다. 친목을 도모하는 동기생 방에서 정치적 혹은 종교적 이슈는 거론하지 않는 게 불문율처럼 관습화돼 있었다고 생각한 것은 나만의 착각이었을까.

동기생이 모인 방에서 탄핵에 대한 찬반을 표현하는 것은 정치적 이슈가 아니라 우리 생존과 관련된 중차대한 문제이기 때문에 차원이 다르다,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는 등, 처음 문제를 제기한 그룹에서는 강하게 반발했다. 요컨대 그들은 너희도 우리와 같은 사고방식을 가져야 하고, 우리와 생각이 ‘같아야’만 하고, 우리와 행동을 ‘함께’해야만 한다는 동일성 신화에 매몰돼 있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십수 년 이어져 온 동기생 방에서 탈퇴한 친구까지 나왔지만, 그들의 생각은 완강했다. 슬프게도 그들의 이러한 태도는 지금도 전혀 바뀌지 않았다는 게 내 판단이다. 다만 친목과 화합을 깨는 이런 분위기를 우려한 여러 친구가 중재에 나서면서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을 뿐이다.

사람이 동일성에 대해서 이렇게 집착하는 것은 ‘사회적 동일시(social identification)’ 와 관련 있다. 사람은 자신이 속한 집단에 소속감을 느끼면서 정체성을 형성하고 자존감을 얻는다. 문제는 그 정도가 어느 선을 넘을 때다. 같은 집단에 속한 사람이라도 자기 의견과 다른 의견에 대해서는 강한 이질감을 느끼게 된다. 사정이 이렇다면 자기가 속한 집단 밖의 사람, 그러니까 남의 편에게는 적대감까지 가질 수 있음을 우리는 충분히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이제는 질문을 다시 던져야 한다. ‘우리가 남이가?’라는 말이 관계의 강요가 아니라, 차이를 존중하는 연대의 표현이 되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할까? 개별성을 존중하면서도 연대할 수 있는 문화, ‘같음’이 아닌 ‘다름 속의 관계’를 추구하는 심리적 성숙이 우리 사회에 필요하다. 동수 말처럼 단순히 ‘니는 니 길 가고, 나는 내 길 가는 기라’가 아니다. ‘우리가 남이니까, 서로를 더 잘 이해하려고 한다.’ 이런 태도가 진정한 공동체로 가는 출발점이 아닐까 해서 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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