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적 패러다임의 전환

고봉진 2025. 5. 26. 0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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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世通, 제주 읽기] (323) 토머스 쿤(김명자, 홍성욱 역), 과학혁명의 구조, 까치, 2013
사진=알라딘

이번에 소개할 책은 1962년에 출간된 토머스 쿤(Thomas S. Kuhn)의 '과학혁명의 구조'이다. 이 유명한 책에서 쿤은 과학에서의 진보가 점진적, 누적적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패러다임의 전환'이라는 '과학혁명'의 방식으로 일어난다고 주장했다. 

쿤은 서문에서 이 책의 저술로 이끈 자신의 경력을 간략하게 서술한다. 특히 이 책의 최종 단계로 이끈 인상적인 경험을 소개하는데, 그가 1958-59년에 '행동과학 고등연구소'에 머물렀을 때의 일이다. 그곳에서 그는 과학적 문제와 방법의 본질에 대해 사회과학자들 사이에 공공연한 의견 대립이 있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자신이 이제껏 몸담았던 자연과학자들의 사회와 행동과학 고등연구소에서 보았던 사회과학자들의 사회가 확연하게 달랐던 것이다. 이 차이의 근원을 찾으려는 시도를 통해 쿤은 '패러다임'이 과학적 탐구에서 지니는 역할을 깨달았다.  

쿤에 따르면, 사회과학과 달리 자연과학에서는 자연과학자 사회에서 받아들여진 핵심적인 과학적 성취를 '패러다임'으로 받아들이고 이를 충실히 따라간다. 대부분의 과학적 연구는 '패러다임'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은 채, 패러다임을 세부적인 문제까지 깊게 끌고 가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하지만 '패러다임의 전환'에서는 매우 다른 모습이 나타난다. 쿤은 패러다임의 전환을 통해 '과학혁명'이 일어난다고 봄으로써 자연과학자 사회에 또 다른 면모가 있음을 보였다.

정상과학과 패러다임

토머스 쿤은 '정상과학'(normal science) 개념에서 이 책의 논의를 시작한다. 그가 말하는 '정상과학'은 과거의 과학적 성취에 확고한 기반을 둔 연구 활동을 말한다. 이때 과학적 성취는 과학자 사회에서 일정 기간 동안 과학 활동의 틀로 인정되는 업적일 것을 요한다. 이를 쿤은 '패러다임'(paradigm)이라고 일컬었다.   

넓은 의미의 '패러다임'은 한 시대를 지배하는 과학적 인식이나 사고, 관념, 가치관이 결합된 총제적인 틀을 의미한다. 이와 관련해서 쿤은 책 후반부에서 다루었다. 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대와 갈릴레오의 시대를 비교하면서 각 시대의 의미 틀을 이해해야 각 시대의 과학을 이해할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운동 개념은 뉴턴의 운동 개념과는 상이한데 이는 서로 다른 패러다임에 기인한다.  

하지만 쿤이 책 초반부와 중반부에서 주로 다룬 '패러다임' 개념은 '과학적 패러다임'(scientific paradigm)으로, 어느 한 시기 동안 과학자들에게 문제해결책을 제공하는 것으로 수용되는 과학적 성취를 뜻한다. "과학자들은 새로운 이론의 창안을 목적으로 하지도 않으며 다른 과학자들에 의해서 창안된 것들을 받아들이려고도 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다. 오히려 정상과학적 연구는 패러다임이 이미 제공한 현상과 이론을 명료화하는 것을 지향한다." 

쿤에 따르면, 과학자들은 정상과학을 '퍼즐 풀이'(puzzle solving)처럼 행한다. 그는 과학자들의 연구가 정상과학이 정해준 틀 안에서 퍼즐 맞추는 것과 비슷하다고 설명했다. '퍼즐 풀이로서의 정상과학'은 정상과학의 강제적인 성격을 말해준다. 쿤은 다음과 같은 충격적인 발언도 서슴지 않았다. "정상과학은 패러다임이 미리 만들어놓은 비교적 경직된 상자 안에 자연을 처넣으려는 노력이다." 

패러다임의 전환

하지만 '퍼즐 풀이'로 풀리지 않는 '이상 현상'이 발생하면 그때서야 비로소 정상과학에 의문을 제기되고 다른 해결책을 찾아 나선다. 이는 정상과학의 위기이며 패러다임의 전환이 준비되는 과정이기도 하다. 위기는 새로운 이론 출현의 필수적인 선행 조건이다. 

하나의 패러다임을 거부하는 결단은 언제나 그와 동시에 다른 패러다임을 수용하는 결단이 된다. 새로운 패러다임은 이전 정상과학의 퍼즐 풀이에는 도움이 되지 않지만, 새로운 퍼즐 풀이를 가능하게 한다. 

'패러다임의 전환'의 유명한 예는 프롤레마이오스 천동설에서 코페르니쿠스 지동설로의 전환이다. 이 외에도 쿤은 '연소에 대한 라부아지에의 산소 이론'과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을 예로 든다. 새로운 이론은 퍼즐 풀이의 현저한 실패를 맛본 후에야 비로소 출현한다. 

위기에 처한 패러다임으로부터 정상과학의 새로운 전통이 태동할 수 있는 새로운 패러다임으로의 이행은 '축적으로서의 과학관'과 거리가 멀다. 쿤은 과학에서 '축적에 의한 발전'(development by accumulation)이라는 개념에 의문을 제기했다. 그는 패러다임의 변화를 '게슈탈트(형체) 전환'(Gestalt switch), '종교적 개종'(conversion)에 비유하며 과학 변동의 단절적 측면을 부각시켰다. 

과학혁명 

쿤은 '패러다임의 전환(변화)'을 '과학혁명'이라고 명명하며 '혁명'이라는 자연과학에는 어울리지 않을 법한 용어를 사용했다. 쿤은 정상과학의 기존 패러다임이 작동하지 않고 새로운 패러다임이 받아들여지면 과학자 사회에서 혁명과 같은 일이 일어난다고 봤다. 과학혁명에서 출현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은 이전 패러다임과는 양립할 수 없고(incompatible), 같은 표준이나 기준으로 비교 불가능하다(incommensurable). 

정치혁명이란, 기존 제도가 주위 상황에 의해서 제기되는 문제들을 이제 더 이상 적절하게 해결할 수 없다는 의식이 흔히 정치적 사회의 집단에 편재되어 팽배하면서 시작된다. 이와 상당히 비슷한 방식으로 과학혁명이란, 기존 패러다임이 자연 현상에 대한 다각적인 탐사에서 이전에는 그 방법을 주도했으나 이제 더 이상 적절하게 구실을 하지 못한다는 의식이 과학자 사회의 좁은 분야에 국한되어 점차로 증대되면서 시작된다. 정치적, 과학적 발전의 양쪽에서 위기로 몰고 갈 수 있는 기능적 결함을 깨닫는 것은 혁명의 선행 조건이다. (141, 142면)

새로운 패러다임은 처음에는 지지자를 얻지 못하고 그 동기도 의심받는다. 하지만 새로운 패러다임이 우위를 점하면 점점 많은 과학자들이 개종을 한다. 패러다임의 전환이 최종적으로 이루어지면 새로운 패러다임에 기초한 정상과학이 펼쳐진다. 그럼에도 소수의 저항자는 여전히 새로운 패러다임을 수긍하지 않는다. 쿤은 막스 플랑크의 글을 인용하면서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했다. 

"새로운 과학적 진리는 그 반대자들을 납득시키고 그들을 이해시킴으로써 승리를 거두기보다는, 오히려 그 반대자들이 결국에 가서 죽고 그것에 익숙한 새로운 세대가 성장하기 때문에 승리하게 되는 것이다." (막스 플랑크)

나가며

쿤의 '정상과학'과 '패러다임 전환'에 대해 모두가 긍정적인 평가를 내린 건 아니다. 대표적으로 칼 포퍼(Karl Popper)는 쿤의 정상과학 개념을 싫어했다. 포퍼의 '비판적 합리주의'는 '반증 가능성'(falsifiability)을 핵심 개념으로 하는데, 그는 반증 가능한 테스트를 통해 실험과 관찰 결과를 검증하는 과학적 방법을 주장했다. 포퍼는 1965년 '정상과학과 그 위험성'이라는 논문에서 쿤의 정상과학은 과학의 발전을 막을 뿐 아니라 문명 자체를 위협한다고 비판했다. 

포퍼의 비판에 대해 쿤과 그 지지자들은 과학자들이 자기 이론의 모순을 발견한다고 해서 매번 그것을 폐기할 수는 없으며, 이러한 상황은 매우 드물게 일어난다고 항변했다. 변칙 사례가 등장할 때마다 이론을 포기한다면 과학 활동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봤다. (스티브 풀러, 나현영 역, 쿤/포퍼 논쟁, 생각의나무, 2007 참조) 

포퍼는 소크라테스 이전 고대 그리스의 철학(이오니아 철학)을 과학의 시초로 여겼지만, 쿤은 과학이 제대로 시작되기 이전의 상태로 보았다. 이오니아 철학에는 비판이 있었을 뿐이고 건설적인 과학 활동이 없었다는 것이다. 포퍼는 과학 활동에 비판이 결여되면 전체주의의 위험이 발생한다고 보았지만, 쿤은 과학이 자유주의를 보호하는 정치적 역할을 수행할 수 없다는 견해를 피력했다. 쿤은 포퍼의 주장과 정반대로 비판적 논의를 정지하는 것이 과학의 시작이라고 언급한다. (장하석, 과학, 철학을 만나다, 이비에스미디어, 2014 참조)

칼 포퍼의 '탐구의 논리'와 더불어, 토머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는 과학사, 과학철학의 고전으로 꼭 읽어야 할 책이다. 쿤이 제시한 '패러다임의 전환'에 대해 자연과학에서 여전히 여러 논란이 있을 뿐 아니라 사회과학에서도 이 개념이 유효할지에 대한 의견 대립이 지속되고 있다. 다양한 분야에서 논쟁의 중심에 있다는 것은 쿤이 제시한 이론의 영향력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마지막으로 언급해야 할 것이 있다. 쿤은 자신의 이론을 뒷받침하기 위해 수많은 과학 사례를 예로 들었다. 쿤이 언급한 과학 사례들은 과학도가 아니면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비전문가인 필자도 잘 알지 못해 그냥 넘긴 것이 꽤 많다.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훨씬 더 많았다. 그럼에도 (모르는 내용을 알려고 노력해야겠지만)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독서를 포기해선 안 된다. 고전에 나온 내용을 완벽하게 이해하는 독자는 그리 많지 않다. 중요 내용을 파악하는 독서도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고봉진

제주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고려대 법학과 졸업, 독일 프랑크푸르트대학 법학박사. 
제주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법철학/법사회학 전공).

블로그: blog.naver.com/gojuraphi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