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비명은 ‘내 연극 보러 언제 올래?’… 배우 박정자의 바닷가 ‘생전 장례식’
출연작 적힌 깃발 든 예술가 150명 장례 행진

25일 오후 강원도 강릉 사천면 산대월리 순포해변. 만장(輓章)을 든 ‘조문객’ 150여 명이 긴 장례 행렬을 이루며 걷고 있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장례식이라면 으레 침통하고 우울해야 할 텐데, 사람들은 활짝 웃고 떠들며 만장을 깃발처럼 흔든다. 가만 보니 만장마다 ‘위기의 여자’, ‘에쿠우스’, ‘파우스트’, ‘이어도’ 같은 낯익은 연극과 영화 제목이 적혀 있다. 배우 박정자(83)의 ‘생전 장례식’을 겸해 열린 영화 ‘청명과 곡우 사이’(각본·감독 유준상)의 하이라이트 장면 촬영 현장. 형광 연둣빛 꽃무늬 드레스에 곱게 화장을 한 배우 박정자도 활짝 웃으며 자신의 장례식에 온 ‘조문객’들을 만나고, 앞장서 걸었다.

솔밭길을 통과해 바닷가로 나간 장례 행렬은 박정자를 가운데 두고 둥글게 둘러서더니, 이내 사라졌다. 모래사장엔 노배우가 평생 출연한 작품 제목이 적힌 깃발만 남았다. 그 모든 ‘이름’을 뒤로 하고, 박정자는 홀로 흰 종이상여를 들고 바다로 나아갔다. ‘해태 부라보콘’ ‘오리온 투유’ 등 1970년대부터 히트 광고를 만들었던 한국의 1세대 CF 감독인 남편 이지송 감독은 잔치처럼 기쁜 마음으로 박정자와의 인연을 기리는 긴 행렬을 보며 “그동안 참 잘 살아왔던 덕분”이라며 웃었다.
촬영 도중 잠시 짬이 났을 때 박정자 배우에게 자신의 장례식을 미리 치르는 기분이 어떠신가 슬쩍 물었다. 그는 두 팔을 활짝 벌리고 환하게 웃으며 이 영화의 주제곡 제목으로 답을 대신했다. “환~한, 웃음으로~!”

◇노래처럼 “환한 웃음으로!”
‘청명(淸明)과 곡우(穀雨) 사이’는 배우로도 널리 알려진 유준상(56) 감독의 다섯번째 장편영화다. 기억을 잃어가는 노배우를 통해 늙어감과 죽음의 의미를 들여다보는 이야기. 전날 ‘장례식 전야제’부터 이날 촬영까지 배우 박정자의 1박2일 사전 장례식은 그 자체로 축제였다. 강부자, 강필석, 김호영, 남명렬, 배혜선, 박지일, 손봉숙, 송승환, 양희경, 오지혜, 정경순 등 배우들과 연출가 손진책, 한태숙, 무대 디자이너 박동우, 국악 작곡가 원일, 소리꾼 장사익 등 예술가들, 길해연 한국연극인복지재단 이사장, 방지영 한국 아시테지 이사장, 송형종 서울문화재단 대표, 안호상 세종문화회관 사장, 이창기 서울시 문화수석, 김동호 전 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 신현웅 전 문화부 차관, 김종규 전 문화유산국민신탁 이사장 등 전현직 기관장과 예술행정가들이 참여했다.

전날 24일 강릉은 종일 비가 내렸다. 전야제 장소인 강릉시 성산면 ‘왕산 어흘리246′은 수국이 아름다운 지역 명소로, 평소에도 문학 관련 행사가 자주 열리는 곳. 좁은 실내에 모여 앉은 ‘조문객’들은 조화와 부의 대신 들고 온 박정자와의 기억을 나눴다. 인간 박정자, 배우 박정자의 이야기였다.
◇눈물과 조화(弔花) 대신 웃음과 추억
고(故) 오현경·윤소정 배우 부부의 딸 배우 오지혜는 “첫 무대 때 엄마와 딸로 말싸움 장면을 연습하는데, 기세에 눌려 처음엔 입만 쳐다봤다”고 추억했다. “‘넌 니 엄마랑 싸울 때 눈도 안 보니? 다시!’ 그 말씀에 오기가 생겨서 마음을 다 잡고,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대사를 마쳤어요. 딱 한 마디 하시는데, ‘그렇지.’ 정말 돈 주고도 못 배울 걸 가르쳐 준 분이세요. 저희 어머니 빈소에서도 상주처럼 제 곁에서 오시는 연극계 어른들을 맞아주셨고, 저는 여전히 ‘선생님’ 아닌 ‘엄마’라고 부릅니다.”
양희경(71) 배우는 “1998년 연극협회가 직전 해 세계연극제를 하느라 진 빚 3억을 갚아주려고 박정자, 양희경, 윤석화, 하희라, 신애라, 임상아가 함께 세종문화회관에 뮤지컬 ‘넌센스’를 공연했었다”고 회고했다. “첫 날 첫 공연, 원장 수녀(박정자)가 시작해야 하는데 대사를 안 하고 부원장 수녀인 저한테 오시는 거예요. ‘수녀님, 오늘 우리 뭐부터 해야 하죠?’ 그 때 눈치챘죠. 아, 이 분도 대사를 잊을 때가 있구나. 저도 애드립으로 ‘원장 수녀님, 소개부터 하셔야죠’ 하고 알려드렸어요. 공연은 전석 전 회 매진됐고, 연극협회의 빚도 다 갚을 수 있었습니다.”
배우 강부자(84), 라디오 DJ로 더 유명한 성우 김세원(79)도 박정자와의 기억을 말했다.
◇묘비명은 ‘너 내 연극 보러 언제 올래?”
이제 박정자 배우의 ‘남자 친구들’ 차례. ‘1호 남친’ 김동호 전 부산영화제 집행위원장이 “연극 ‘신의 아그네스’를 보고 반해서 30~40년 박정자 배우 뒤를 쫓아다니다 보니 이제야 ‘남자친구 1호’로 불릴 수 있게 됐다”고 말할 땐 환호와 박수가 터져 나왔다. ‘2호’ 신현웅 전 문화부 차관, ‘3호’ 김종규 전 문화유산국민신탁 이사장에 이어 사진작가 김용호, 건축가 유병안과 ‘막내 남친’ 뮤지컬 배우 김호영까지. ‘박정자의 남자친구’들이 호명될 때 마다 ‘조문객’도 폭소를 터뜨렸다.
유준상 감독과 박정자 배우를 연결해주고, ‘생전 장례식’ 행사를 도운 박용재 시인은 “박정자 배우의 묘비명은 ‘너 언제 내 연극 보러 올래’가 될 것”이라고 했다. 그 말을 늘 들어온 조문객들이 모두 한꺼번에 환호하며 박수를 쳤다.

박정자 배우는 자신과의 추억을 되돌아보는 이야기를 다 들은 뒤 이날 전야제 순서 막바지에 잠깐 인사를 했다. “여러분들이 계셔서 행복합니다. 제가 드릴 말씀은 정말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오늘 이 시간이 여러분들한테 정말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기를 바라고, 모쪼록 건강하시고 그리고 행복하십시오. 오늘 저는 지금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생전 장례식’ 축하 공연도 이어졌다. 24일엔 독일에서 주로 활동하는 ‘고(古)음악의 디바’ 임선혜 소프라노가 이 영화의 주제곡 ‘환한 웃음으로’ 등을 불렀고, 비올리스트 김남중과 아코디언 연주(알렉산더 셰이킨, 박성환) 협연도 있었다.
/강릉=이태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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