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향만리] 화상보(華想譜) / 박재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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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이 휘인 채 꽃진 꽃대같이 조용히 춘향이는 잠이 들었다.
칼 위에는 눈물방울이 어룽져 꽃이파리의 겹쳐진 그것으로 보였다.
"칼 위에는 눈물방울이 어룽져 꽃이파리의 겹쳐진 그것으로 보였다. 그렇다, 그것은 달밤일수록 영롱한 것이 오히려 아픈, 꽃이파리 꽃이파리, 꽃이파리들이 되어 떨고 있었다." 이 얼마나 애절하고 절절한가.
또한 춘향의 깊고 깊은 서러움을 꽃이파리의 겹쳐진 그것의 반복으로 처리한 시법은 역시 박재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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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상보(華想譜) / 박재삼
목이 휘인 채 꽃진 꽃대같이 조용히 춘향이는 잠이 들었다. 칼 위에는 눈물방울이 어룽져 꽃이파리의 겹쳐진 그것으로 보였다. 그렇다, 그것은 달밤일수록 영롱한 것이 오히려 아픈, 꽃이파리 꽃이파리, 꽃이파리들이 되어 떨고 있었다.// 참말이다. 춘향이 일편단심을 생각해 보아라. 원(願)이라면, 꿈속엔 훌륭히 꽃동산이 온전히 제것이 되었을 그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가꾸는 슬기 다음에는 마치 저 하늘의 달에나 비길 것인가, 한결같이 그 둘레를 거닐어 제자리 돌아오는 일이나 맘대로 하였을 그것이다. 아니라면, 그 많은 새벽마다를 사람치고 그렇게 같은 때를 잠깨일 수는 도무지 없는 일이란 말이다.
『춘향이 마음』(1962년, 신구문화사)
박재삼(1933~, 일본 출생, 사천 성장)은 시조(時調)의 기본 틀인 3·4, 4·4조의 율조와 7·5조의 민요를 온전히 자기류로 익힌 듯하다. 정형적 틀을 유지하되 사설시조의 파격이 보이며, 동시에 자유시의 분방함과 판소리의 가락까지 포괄한 한국인의 원형 시법을 꿰뚫었다. 그의 시는 여인들의 서럽고 슬픈 삶에 묻힌 한(恨)의 정서를 선(線)으로 그려내어, 홀린 듯한 몽환과 애조로 독자의 심금을 파고들었다. 특히,「화상보華想譜」는 춘향이 속내에 살아보지 않고서야 도무지 나올 법하지 않는 슬픈 시다. 현실 세계와 가상 세계의 중첩은 시의 절묘를 얻었다. 시인 몰래 싹 훔쳐 와 혼자 두고두고 꺼내 읽고 싶은명작이다. 「화상보華想譜」의 시공간은 춘향이를 자빠뜨리지 못한 변학도의 극악함이 최고조에 달한 때이다. 변 사또의 수청을 단호히 거부한 춘향은, 형틀에 매여 태장 곤장에 뼈가 부스러지도록 얻어맞는다. 그 절망적 고통 속에서도, 옥중 목에 칼을 차고 사랑하는 몽룡을 떠올리며 눈물로 노래한다. "칼 위에는 눈물방울이 어룽져 꽃이파리의 겹쳐진 그것으로 보였다. 그렇다, 그것은 달밤일수록 영롱한 것이 오히려 아픈, 꽃이파리 꽃이파리, 꽃이파리들이 되어 떨고 있었다." 이 얼마나 애절하고 절절한가. 옥(獄)에 갇힌 어룽진 춘향의 심리적 굴곡을 이보다 섬세하게 형상화할 수 있을까. 그는 단순히 꽃이 아니라 '꽃이파리'로, 눈물이 아니라 '눈물방울'로, 시각의 촉각화를 통해 공감각적 심상을 얻었다. 또한 춘향의 깊고 깊은 서러움을 꽃이파리의 겹쳐진 그것의 반복으로 처리한 시법은 역시 박재삼이다. 「화상보華想譜」의 또 다른 매력은 시적 허용에 있다. 다른 현대시에서는 눈 닦고 볼래야 볼 수 없는, 2연의 "~제것이 되었을 그것이다." "~맘대로 하였을 그것이다." "~도무지 없는 일이란 말이다."의 종결형은 두고두고 연구 꺼리다. 아마 박재삼 시인이 시조 가락을 체화하지 못했다면, 한국의 현대시 속에 이런 희한한 전통 가락의 진풍경은 결코 두 번 다시 못 볼 뻔했다.
김동원(시인·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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