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세 돌파구 찾는 재계…총수들은 ‘민간외교’ 박차
[비즈니스 포커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가 한국에 부과한 25%의 상호관세와 철강·자동차·반도체 등 품목별 관세의 감면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한·미 양국은 현재 7월에 협상을 타결한다는 ‘줄라이 패키지’ 협상을 진행 중이다.
하지만 비상계엄과 탄핵을 거치며 한덕수 전 국무총리와 최상목 전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잇따라 사퇴하며 경제사령탑 부재로 통상 대응은 물론 대외신인도에도 빨간불이 켜졌다.
정상 외교 및 국가 경제 컨트롤타워 부재 상황 속에서 재계가 대외 경제외교에 적극 나서고 있다. 미국발 관세전쟁 파장 속에서 글로벌 경영으로 돌파구를 찾는 모습이다.

이재용, 한 달 새 두 번 찾은 日…최태원도 간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은 지난 4월에 이어 한 달 사이 일본을 두 번 방문했다. 글로벌 공급망 점검과 함께 현지 협력사, 고객사 관계자들과 사업 협력 방안을 논의한 것으로 추정된다. 삼성의 일본 내 협력사 모임인 ‘LJF(이건희 일본 친구들)’ 소속 반도체·디스플레이 등 소재·부품 협력사들과 만난 것으로도 알려졌다.
재계 일각에서는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 등과 만나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 동맹을 다질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기도 했다. 업계에서는 삼성전자가 5월 13일 초슬림 스마트폰 ‘갤럭시S25엣지’를 선보인 만큼 NTT도코모, 소프트뱅크, KDDI 등 일본 3대 통신사 관계자들과 만나 갤럭시S25엣지의 공급 및 마케팅 논의를 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삼성전자는 한·일 양국의 갤럭시 신제품 출시 시차를 일주일로 줄이는 등 일본 휴대폰 시장 공략에 집중하고 있다. 일본 휴대폰 시장은 연간 3200만 대가 팔리는 세계 4위 시장이지만 삼성전자의 점유율은 6%대에 그치고 있다. 애플의 점유율은 50%에 육박한다.
이 회장은 지난 3월에는 중국발전포럼(CDF) 참석차 2년 만에 중국을 방문해 글로벌 CEO 면담 자리에서 시진핑 국가주석과 만났다. 이 회장은 오래전부터 시 주석을 비롯해 국무원 총리, 정치국 사무위원 등 중국 핵심 인사들과의 네트워크 구축과 현지 사업 기반 강화에 노력을 기울여왔다.
지난해 사업보고서에 따르면 삼성전자의 중국 매출은 64조9000억원으로 전체 매출(209조원)의 약 31%를 차지하는 중요한 시장이다. 삼성전자는 중국 업체들과 스마트폰과 가전 사업에선 경쟁하지만 반도체·디스플레이 등에서는 고객사다.
이 회장은 중국 방문 당시 베이징 샤오미 전기차 공장, 남부 광둥성 선전에 있는 세계 최대 전기차 업체 BYD(비야디) 본사를 각각 방문했는데 미래 먹거리인 전장사업 확대를 위해 세일즈에 나선 것으로 보인다.

최태원 SK그룹 회장 겸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은 5월 말 일본에서 열리는 ‘닛케이포럼-아시아의 미래’에 참석한다. 닛케이 포럼-아시아의 미래는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정치, 경제, 학계의 리더가 모여 아태 지역의 다양한 문제나 아시아의 역할 등에 대해 의견을 나누는 국제회의다. 최 회장은 2018년 이후 6년 만인 지난해 연사로 참가한 바 있으며 올해로 2년 연속 참석한다.
최 회장은 그간 글로벌 통상 환경 변화 등에 대한 해법으로 일본과의 파트너십을 통한 경제 권역의 규모 확대를 꾸준히 제안해 왔다. 최 회장은 최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 초청 경제5단체 간담회에서도 일본과의 경제 연대 모색을 제안하며 “단순한 협조 정도가 아니라 유럽연합(EU)과 같은 경제공동체를 만들어야 한다”며 “현재 GDP 2조 달러가 안 되는 대한민국 경제를 일본과 합쳐 6조 달러 이상, 거의 7조 달러에 달하는 규모로 발전시킬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번 방문에서도 한·일 경제협력 공동체 추진 등 양국 간 경제협력 확대 방안을 모색할 것으로 보인다. 일본 정재계 인사들과의 다양한 미팅도 예정된 것으로 알려졌다. 일각에서는 최 회장이 이번 방문에서 이시바 시게루 일본 총리를 예방할 가능성도 언급된다.
최 회장은 트럼프 2기 행정부의 관세정책에 대응하기 위해 올해 2월 국내 20대 기업 최고경영자(CEO)로 구성된 ‘대미 통상 아웃리치 사절단’을 꾸려 미국을 방문해 하워드 러트닉 상무장관과 면담을 전격적으로 성사시키며 재계 맏형 역할도 해내고 있다는 평가다.
러트닉 장관과 사절단의 면담은 지난 2월 21일(현지 시간) 러트닉 장관의 취임 선서식을 불과 3시간가량 앞두고 이뤄졌다. 최 회장과 아웃리치 사절단은 당시 백악관 고위 당국자와 의회 주요 의원들, 재무부 관계자 등을 만나 한국 기업들의 대미 투자 기여를 적극 알리는 한편, 미국이 한국을 ‘무역적자국’으로 규정한 논리의 오해를 바로잡기 위한 자료도 직접 준비해간 것으로 알려졌다.

정의선·구광모 ‘관세 무풍지대’ 인도 공략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도 미국, 중국, 인도 등을 찾으며 글로벌 경영에 힘을 싣고 있다. 정 회장은 5월 초 중국 상하이에서 열린 ‘상하이 모터쇼’에 7년 만에 방문해 중국 CATL 등 배터리 업체부터 모멘타·샤오펑 등 자율주행차 기술 기업까지 직접 현장을 살펴본 것으로 알려졌다.
현대차·기아가 참가하지 않은 상하이 모터쇼에 정 회장이 방문한 것을 두고 현대차가 최근 중국 시장 공략에 속도를 내고 있는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는 분석이 나왔다. 현대차는 준중형 전기 스포츠유틸리티차(SUV) ‘일렉시오’를 시작으로 2027년까지 중국 시장을 겨냥한 신에너지차 6종 라인업을 구축할 계획이다.
지난 3월에는 백악관을 방문해 트럼프 대통령 옆에서 향후 4년간 미국에 210억 달러(약 30조원)를 투자한다고 발표했다. 여기에는 루이지애나주에 58억 달러를 투자하는 현대제철 제철소 건설도 포함돼 있다.
정 회장은 당시 “4년간 210억 달러의 신규 투자를 추가로 발표하게 돼 기쁘다”며 “우리가 미국에 진출한 이래 가장 큰 규모의 투자”라고 밝힌 바 있다. 트럼프 2기 행정부는 자국의 자동차산업 보호를 위해 수입산 자동차에 대해 지난 4월 3일부터 25%의 품목 관세를 부과하고 있다.
지난 4월 한국의 대미 자동차 수출액이 전년 동기 대비 20% 가까이 감소하며 관세 영향이 본격화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현대차는 미국발 관세에 대응하기 위해 조지아주 신공장 현대차그룹 메타플랜트 아메리카(HMGMA) 가동을 확대하고 있다. 관세 돌파구 차원에서 인도, 인도네시아, 사우디아라비아 등으로 판매처 다변화에도 나서고 있다.
구광모 LG그룹 회장은 지난 2월 올해 첫 해외 출장지로 인도를 방문해 “인도 시장에서 어떤 차별화를 통해 경쟁 기업을 앞서갈 것인지 향후 몇 년이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LG그룹 총수가 직접 인도를 방문한 건 2004년 고 구본무 선대회장 이래 21년 만이다. 구 회장은 인도 노이다 가전공장부터 유통매장, 연구소 등을 둘러봤다.
LG전자는 프리미엄 가전 수요에 대응하기 위해 총 6억 달러(약 8400억원)를 투입해 인도 스리시티에 세 번째 가전공장을 짓고 있다. LG전자는 최근 인도 가전 시장점유율 1위를 기록하며 ‘국민 브랜드’ 입지를 강화하고 있다.
인구 최대 국가로 중국을 대체하는 거대 소비시장을 둔 인도는 미국 관세정책에 대한 돌파구로 주목받으며 글로벌 기업들의 진출이 활발하다. LG전자는 인도에서 지난해 연간 매출 3조7910억원, 순이익 3318억원을 기록하는 등 상승세를 이어가고 있다. 인도 증시 상장도 준비 중이다.

‘트럼프家 친분’ 정용진 글로벌 네트워크 주목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은 동남아시아 공략에 집중하고 있다. 지난 4월 28일 한국경제인협회 경제사절단을 이끌고 동남아 핵심 시장인 인도네시아를 방문해 프라보워 수비안토 대통령을 만났다.
사절단은 지난해 10월 프라보워 신정부 출범 후 파견된 첫 경제사절단으로 한국 경제계 차원에서 처음 이뤄지는 공식 교류로 주목받았다. 신 회장은 “한국 경제계는 프라보워 대통령이 중점 육성 중인 다운스트림(원자재 가공) 산업, 신재생에너지, 인프라, 디지털 경제 분야에서 인도네시아 기업들과 긴밀히 협력하고자 한다”고 강조했다.

트럼프 2기 출범 이후 정용진 신세계그룹 회장의 글로벌 네트워크도 한·미 경제협력의 가교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정 회장은 트럼프 대통령의 장남이자 2기 행정부 막후실세로 불리는 트럼프 주니어와의 두터운 친분을 바탕으로 지난 4월 트럼프 주니어 방한 당시 국내 주요 대기업 총수들과의 만남을 주선했다.
김동관 한화그룹 부회장, 신유열 롯데지주 미래성장실장, 이재현 CJ그룹 회장, 조원태 한진그룹 회장, 구자은 LS그룹 회장, 허용수 GS에너지 사장, 이해진 네이버 의장 등이 총출동해 트럼프 주니어와 면담했다. 정 회장은 최근 트럼프 대통령의 중동 순방에 초대돼 트럼프 대통령과 타밈 빈 하마드 알사니 카타르 국왕과도 만났다. 한국 기업인으로는 유일하게 이 자리에 초대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재계에선 정 회장이 대미 관계에서 영향력 있는 인물로 인정 받는 만큼 향후 한·미 관계에 긍정적 영향을 미칠 것이란 기대가 나오고 있다.
안옥희 기자 ahnoh05@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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