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과 길 물과 물에는 길이 있지요
이윤 시인 '우수와 오수 사이'
사는 것은 욕망의 그림자 씹는 것
각도를 달리하면 다른 무엇 있고
흐르는 길 있어 조용히 흘러 산다

어떤 시인은 낮은 곳을, 잘 보이지 않는 곳, 주목하지 않는 것을 주목하며 삶의 의미를 불어넣는다. 화려하지 않아 관심을 가지지 않으면 지나치는, 어느 귀퉁이에 놓여진, 홀로 핀 꽃을 통해 삶을 본다.
이윤 시인의 시집 '우수와 오수 사이'는 꽃들을 통해 시적 화자의 삶을 투영하고 삶의 그늘과 욕망, 아픈 투쟁과 희생의 역사를 돌아보기도 한다. 한 권의 시집에 무려 15편의 꽃에 관한 시가 있다. 시적 화자는 수로왕의 탄생지(구지봉)와 가야시대의 인물 수로왕과 허황후를 현재의 공간에 불러내기도 하고, 여행지에서 만난 새로운 것에 주목하기도 한다.
꽃은 어디에나 핀다. 어디에서나 우리는 살아간다. 벼랑 끝에 서 있어도 살아가고, 목숨이 있는 한 어떻게든 살아간다. 죽지 못해 살기도 하고, 역사 앞에서 당당한 사람도 있고 부끄러운 사람도 있다. 당당함을 위해 나름의 노래를 불렀던 사람들이 있다. 무심히 피고 지는 꽃들, 수많은 사람들이 억울하게 죽어간 한 서린 그곳에도 꽃은 참으로 눈물 나게 활짝 핀다.
시 '그 아래 보랏빛 맥문동꽃 피었지'에서 밀양 국민보도연맹 사건을 돌아보며 '미전고개 안내판 밑 보랏빛 맥문동꽃 피었네!', '의문은 반드시 풀려야 한다. 모든 희생자께 호명을 해드려야 한다'고 한다. '더울수록 부겐빌리아 포엽은 더 붉어졌다'로 시작하는 시 '그해 봄, 부겐빌리아'에서는 1979년의 부마항쟁과 1982년 부산미문화원 방화사건을 불러온다.
다른 꽃에 관한 시를 살펴보자.
상처에서 새로운 상처가 오르는 소리, 내 침묵 속에 입 벌리고 있는 또 하나의 상처를 삐비꽃으로 피우다 말고, 사는 건 어쩌면 제 욕망의 그림자를 입에 넣어 씹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어릴 적에 삐비꽃을 질겅질겅 씹어 입안을 끈적거렸듯 햇살은 양수처럼 흐르는데, 그대는 삐비꽃이거나 말거나 ('삐비꽃이거나 말거나' 2연) 파릇한 풀에서 하얗고 보드라운 것이 솟아오른다. 부드러울 때는 껌처럼 계속 씹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삐비꽃은 시간이 지나면 도저히 먹을 수 없을 만큼 억세어진다. '사는 건 어쩌면 제 욕망의 그림자를 입에 넣어 씹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것을 시적 화자는 인식한다. 우리는 언제 씹고 싶은가? 내가 마음 먹은 것이 제대로 되지 않을 때 한없이 씹고 싶은 욕망이 올라오지 않는가.
각도를 달리하면 다른 무엇이 있다. 보이는 대로 보는 대신 보고 싶은 대로 볼 수가 있다. 보았던 것을 다시 안 볼 수도 있고 안 보았던 것을 볼 수도 있다/ 어느 풍경화가 진실에 가까운지 말하기 어렵다. 이쪽 수정체가 알코올에 젖어 있다면 저쪽 수정체는 습관에 물들어 있으니까, 하나의 풍경에 두 개의 풍경화를 담는다. 모든 풍경은 새로워 보인다. 속눈썹 위로 걸터앉은 빗방울 하나가 아득하다('모메꽃이 뱅뱅' 2연) 모메꽃은 메꽃의 방언이다. 메꽃은 나팔꽃과 닮았지만 꽃이 살짝 각이 져 있다. 꽃의 습성이 줄을 감고 올라간다. 방향을 수없이 틀면서 올라가기도 한다. 타고 올라가는 것이 무엇이냐에 따라서 방향을 바꿀 때가 많다. 자라나면서 올라갈수록 방향은 바뀐다. '각도를 달리하면 다른 무엇이 있다'는 것과 '모든 풍경은 새로워 보인다'는 것이다.
'길과 길 물과 물에는/ 땅으로 내려가는 물길이 있어/ 지상은 조용히 흘러 사는 거지' (시 '우수와 오수 사이에서' 1연) 이윤 시인의 시집 '우수와 오수 사이'에서 시집의 제목과 동일한 이 시는 최고의 압권이다. 삶은 거창한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흐르는 순리에 의해서 돌아가는 것이다. 억지를 부릴 때, 욕심을 부릴 때 반드시 탈은 나고 세계는 뒤집힌다.
누군가가 잘 보지 않는 곳, 낮은 곳을 돌아보며, 삶을 차분하게 사유한 이 시집은 세계를 내 안으로 끌어들여 가슴으로 끌어안은 시인의 따듯한 시선이 느껴진다. 격정을 가라앉히고 담담하게 주변 세계를 노래한 시인의 깊은 마음이 시 한 편, 한 편에 속에 녹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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