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욕의 상하이, 파란만장 인물들…미완의 유작이라 더 애틋

조광수 나림연구회 회장·전 한국아나키즘학회 회장 2025. 5. 25. 1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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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주 문학과 인문 클래식 <31> ‘별이 차가운 밤이면’ ② 나림의 상하이 체험기

- 일본 패전 직후 쑤저우서 제대
- 귀국 전 6개월 상하이서 머물러
- 비참여·중립 견지 자유로운 생활
- 임정 인사·망명 러 귀족 등 교류

- 운명의 여인 리샹란과의 인연
- 중국 암흑가 황제 두웨성까지
- ‘별이 차가운…’ 유작에 담아내

- 1945년 초서 끊겨버린 결말
- 손에서 책을 놓을 수 없는 이유

상하이(上海)는 이름 그대로 바다로 향해 열려 있는 도시다. 상하이는 바다와 땅을 잇는 가교다. 열린 가교였던 만큼 상하이는 근현대사의 온갖 영욕이 집중된 공간이다. 1945년 나림 이병주는 “몇 꺼풀을 벗겨도 알맹이가 나타나지 않는 도시” 상하이에서 “극단한 호사와 극단한 빈곤이 공존하고, 도시가 가질 수 있는 죄악의 목록을 골고루 갖춘 도시”를 체험한다.

중국 상하이 공공조계 모습을 담은 자료 사진. 영국과 미국이 중심이 돼 운영한 조계지로 1893년부터 1945년까지 존속했다. 국제신문 DB


▮의협(義俠) 기업인 채기엽

나림은 상하이에서 반년을 체류했다. 1945년 8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다. 일본 패전 후 쑤저우에서 현지 제대하고 동료들과 함께 무작정 상하이로 왔다. 임시정부의 여러 인사를 만났으며, 다양한 파벌과 정당의 초대와 강요도 받았다. 나림과 동지들은 귀국 전까지는 자유롭고 활달하게 상황을 관찰할 뿐, 철저하게 비참여 중립 입장을 취하기로 다짐했다. 의협(義俠) 기업인 채기엽과 우연히 맺은 인연으로 100명이 합숙할 공간을 얻는 등 별 불편 없이 지내며 국제도시 상하이를 탐구하기도 하고 주변의 명승고적을 유람하기도 했다.

나림은 망명 러시아 귀족 등 다양한 경험의 인사들과 교류하고, 일본군 간첩이 순식간에 애국자로 표변해 거들먹거리는 사례를 보며 역겨움과 분노를 느끼기도 한다. 단편 ‘변명’의 장병중과 장편, ‘산하’의 김경재가 바로 그런 인물이다.

상하이에서 나림은 첫 창작물 ‘유맹(流氓) : 나라를 잃은 사람들’이란 3막 4장의 희곡을 쓴다. 나림의 상하이 감상(感想)은 이렇다. “동양과 서양의 기묘한 혼합, 옛날과 지금의 병존, 각종 인종의 대립과 그 혼혈. 호사와 오욕의 선명한 콘트라스트. 전 세계의 문제와 모순을 집약해 놓은 도시. 1945년의 상하이, 한국 사람들이 주인이 없는 틈을 타서 주인인 척 설친 것은 허파가 뒤집힐 정도로 우스운 노릇이나 꼭 기억해 둘 만하다.”

나림의 상하이 체험은 여러 작품에서 다양한 공간과 인물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나림의 미완성 유작 ‘별이 차가운 밤이면’은 2부로 되어 있다. 2부는 상하이가 배경이다. 학병 대신 일본군 특무 장교의 체신(替身: 대리인·대역)으로 복무하게 된 박달세는 상하이 도착 첫날 자신과 유사한 운명의 여성과 인연이 생긴다. 당대 최고 스타 이채란을 호텔 일식집에서 조우한다.

▮리샹란 또는 야마구치 요시코 또는 이채란

야마구치 요시코. 파란 많은 그의 삶은 ‘별이 차가운 밤이면’에서 이채란이라는 인물을 통해 드러난다.


이채란은 실명 리샹란(李香蘭)이다. ‘야래향(夜來香)’과 ‘소주야곡(蘇州夜曲)’을 부른 가수이자 아편전쟁 100주년에 영국과 맞서 아편을 불태웠던 임칙서를 기린 영화 ‘만세유방(萬世流芳)’에서 빛나는 연기를 보인 배우 리샹란은 사실 일본인 야마구치 요시코다. 일본의 대중국 문화 선전의 첨병인 만영(滿映)의 공작으로 중국인을 연기하며 지냈다. 일본 제국주의가 만든 완벽한 가짜 중국인이었다.

중국 전승 후 한간(漢奸)으로 구금되었으나 일본인임을 밝혀 추방되었다. 할리우드와 홍콩에서 배우 생활을 하다가 은퇴하고, 정계로 나서 참의원 3선과 환경처 차관을 지내고 위안부 관련 단체 아시아 여성 기금의 부이사장을 역임하는 등 환경 평화운동을 하며 과거를 보상하려 애썼다.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반대했다. 1987년 자서전 ‘나의 반생’에서 리샹란으로 살았던 시절이 평생 부끄러웠다고 회고했다.

리샹란의 안내로 박달세는 우찌야마 서점에서 상하이에 관한 다양한 정보를 습득한다. 우찌야마 간조는 서점을 문화 살롱으로 키우고, 루쉰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한 문화계 거인이다. 루쉰은 그를 “배신하지 않는 친구”라며 깊이 신뢰했다. 박달세는 우찌야마의 소개로 ‘사기의 세계’를 쓴 다케다 다이준을 만나 루쉰을 배우기도 한다. 루쉰의 위대함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어떠냐는 질문에 다케다는 그 한마디로 표현하라는 대목에서 당황스럽지만, 힌트 하나만 준다고 전제하고 “예술가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예술 작품을 생산하기 때문에 예술가라고 대접하는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그 사람이 예술가이기 때문에 그 사람이 만든 것이면 죄다 예술품이 되는 경우다.”고 답한다.

▮전설 장아이링

상하이는 열린 도시다. 혁명가 자본가 지식인, 그리고 노동자와 난민이 두루 모인 다양하고 복잡한 도시다. 히틀러와 스탈린에게 쫓겨난 유대인 5만 명을 받아들이기도 했다. 홍콩상하이은행(HSBC)을 필두로 금융산업이 융성하고 영화산업도 크게 발달한다. 40개 영화사가 경쟁적으로 영화를 만들고 하루 백만 관객이 관람했다. 루쉰이 딸과 함께 ‘타잔’을 봤고, 루쉰에 버금가는 작가 장아이링(張愛玲)이 활동했다. 상하이는 흑백양도(黑白兩道)를 장악한 거물 두웨성(杜月笙)의 세상이기도 했다. ‘별이 차가운 밤이면’엔 상하이를 대표하는 세 인물 이야기가 다 나온다.

장아이링은 1930-40년대 상하이의 불안감과 화려함을 독특한 문체로 그렸다. 샤즈칭(夏志淸)은 ‘중국현대소설사’에서 장아이링을 루쉰에 방불하는 작가라고 극찬했다. 리안 감독(‘브로크벡 마운틴’과 ‘라이프 오브 파이’로 아카데미감독상을 두 번 받은 타이완 감독)이 연모의 념으로 사숙했던 장아이링에게 바치는 영화라고 했던 ‘색계(色戒)’는 실화이고, 작가의 자전적 내용도 상당하다.

그 스토리를 나림은 박달세와 양미운의 러브스토리와 연결해 소개한다. 냉혹 잔인한 정보부 수장과 명문가 출신 미녀 첩보원의 은원(恩怨)은 그 어떤 영화나 소설보다 더 애틋하고 섬뜩하다. 당대의 문사이자 당대의 플레이보이였던 후란청(胡蘭成)은 ‘금생금세(今生今世)’에서 짧은 기간 부인이었던 장아이링을 기리는 짧은 전기를 썼다. 명문이다. 리안을 비롯한 숱한 문인 예인들이 오마주를 표했다. 리홍장의 외증손녀 장아이링은 곡절 많은 생애의 마지막을 미국에서 은둔하다 떠났다.

▮전설 두웨성

뭐니뭐니해도 요지경 상하이에 가장 어울리는 인물은 두웨성이다. 나림은 그 기막힌 인물을 이렇게 묘사한다. “무식했지만 마키아벨리 이상으로 술책에 능했다. 탈레랑 이상으로 설득력을 가졌고, 로스차일드만큼이나 돈을 가졌고, 메테르니히 뺨칠 정도로 외교 수완을 지녔고, 그러나 본바탕은 알 카포네와 맞먹는 갱스터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아무리 상상력이 풍부한 소설가라도 창출하지 못할 전기(傳奇) 인물이다.

마키아벨리는 이탈리아를 통일해 줄 사자와 여우의 특성을 겸비한 군주를 대망하며 ‘군주론’을 쓴 사상가다. 탈레랑은 나폴레옹을 지존의 자리에 올렸다가 몰락을 유도하기도 한 배짱 좋은 정치인이다. 로스차일드는 최초로 국제 금융 시스템을 구축한 금융 자본의 거두다. 메테르니히는 나폴레옹이 과도한 야심으로 어질러만 놓고 미처 수습하지 못한 유럽의 질서를 정리한 빈 회의의 주도자다. 헨리 키신저를 비롯한 역대 뜨르르한 외교관들이 롤모델로 모시는 외교의 전설이다.

이 네 인물을 하나로 합친 것만으로도 무시무시한데, 거기에 더해 두웨성은 본바탕이 갱스터다. 갱스터의 특성은 문제 해결 방식이 폭력적이라는 데 있다. 아무리 우아한 듯 점잖은 듯해도 폭력 의존적이란 게 암흑가의 특성이다. 두웨성은 흑도(黑道)만 장악한 게 아니다. 중국 역사상 최고 최대 비밀결사 청방(靑幇)의 두목 두웨성은 장제스에게 다 걸었다. 북벌을 지원했고, 상하이사변 후 상하이를 일본군이 장악하자 정보부장 다이리와 협력해 장제스 정부에 무기와 자금을 후원하는 등 반일 비밀업무도 수행했다.

두웨성은 두용(杜鏞)으로 개명한다. 이름이 약해 보여 강렬하고 웅장한 느낌의 글자로 바꾼 것인데, 루쉰의 스승 ‘혁명 성인’ 장빙린이 지어주었다. 당대 최고 실력자 장제스와 상부상조하고 당대 최고 지성 장빙린과 교류했던 암흑가의 황제. 흑도와 백도(白道)에 두루 통하는 강호의 리얼리티가 선명하다. ‘상해탄’ 류의 영화는 그 일단을 아주 조금 보여줄 뿐이다.

▮‘나림봇’을 만들어야 하나

나림의 상하이 체험은 ‘별이 차가운 밤이면’ 후반부에서 더 박력 있게 펼쳐졌을 것이다. 그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1945년 초에서 뚝 끊겨버렸다. 나림봇이란 인공지능을 만들어 나림의 작품을 딥러닝하게 하면 미완성 대목이 충족될까. 아니면 야심만만한 대필 작가를 찾는 게 나을까. 대문호의 미완성 유작은 그저 궁금해하며 그대로 두는 게 맞을까. ‘별이 차가운 밤이면’은 못내 아쉬워 손에서 책을 놓을 수가 없다.

※특별후원 : BNK금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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