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디칼럼] 상처 위의 혁명, 연고 하나가 바꾼 의학사

정승규 약사 2025. 5. 25. 1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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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승규 약사

16세기 중엽 이탈리아반도는 피로 물든 전장이었다. 프랑스와 스페인 그리고 알프스산맥 넘어 신성로마제국이 뿔뿔이 나눠진 이탈리아 도시국가의 패권을 두고 수십 년간 혈투를 벌이고 있었다.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르네상스 예술이 프랑스와 북유럽으로 확산하는 계기가 된 이 전쟁은 근대의 서막을 여는 전환점이 되었고 그와 함께 새로운 약이 탄생했다.

이탈리아 전쟁은 총과 대포 같은 화약 무기가 전투의 전면에 나선 시기였다. 동시에 화약으로 인한 총상과 파편상이 처음으로 의학의 과제로 부상했다. 칼과 창이 아닌 화약 연기가 흩날리는 치열한 전장의 한가운데서 뜻밖의 인물이 약의 역사에 조용한 혁신을 일으켰다. 그는 귀족도 학자도 아니었다. 한때 이발사였던 외과의사 앙브루아즈 파레(Ambroise Pare)였다. 오늘날 우리가 상처에 바르는 연고 치료의 근간을 만든 사람이다.

지금과는 달리 그 무렵 외과의사는 대체로 이발사 외과의였다. 치료에 약초를 주로 이용해서 약초학자라고도 불렸던 내과 의사들은 종기나 단순 열상을 치료하는 당시 외과 의사들을 경시했다. 소독약도 마취제도 없던 시절 간단한 수술은 손재주 좋은 장인들이 했는데 사소한 상처와 찰과상은 이발사가 담당했다.

프랑스 군대의 군의관으로 북이탈리아 전투에 뛰어든 파레는 화약 폭발로 찢어진 살을 꿰매고 사지를 절단하는 일을 했다. 그때까지 상처에 뜨거운 기름을 붓거나 불로 지지는 것은 외과 치료의 유일한 방법이었다. 총상에는 화약의 독성이 있어 끓는 기름으로 소독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상처는 불로 지져야 한다’는 고대 히포크라테스 시대부터 대대로 내려오는 치료법인 소작법이다. 주로 출혈과 감염을 멈추기 위해 사용되었다. 잔인한 방식 때문에 고통 속에 비명을 지르며 죽어가는 병사들이 넘쳐났지만, 그 누구도 소작법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고통은 너무나 견디기 힘들었고 조직까지 파괴되어 회복할 수 없었다.

고통스러워하는 병사들의 모습을 본 파레는 문득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이 고통이 정말 도움이 되는 걸까? 불이 상처를 낫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또 다른 상처를 만드는 건 아닐까?” 그러던 어느 날 야전 병원에서 기름이 떨어졌다. 어쩔 수 없이 그는 자신의 직관을 믿고 달걀노른자와 장미 기름 그리고 송진 기름(테레빈유)을 섞어 만든 연고를 상처에 발라보았다. 그날 밤 파레는 독이 퍼진 부위를 소작하지 않은 것이 두려워 편히 잠들지 못했다. 다음 날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불로 지져진 병사들은 여전히 고통에 시달리고 있었으나 연고를 바른 병사들은 붓기가 덜하고 통증도 줄어 있었다.

그는 직감했다. 상처는 불로 다스릴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조직으로 회복시켜야 한다는 것을. 파레는 끔찍한 관습을 과감히 버렸다. 이는 당시로선 파격적인 발상이었다. 그의 연고는 단순했지만, 그것은 인간의 몸과 고통을 바라보는 방식 자체를 바꿔 놓았다.

파레는 외과를 환자의 고통을 줄이기 위한 과학으로 승화시켰다. 달걀노른자·장미 기름·송진 기름은 각각 피부 재생(레시틴), 항염·항균(시트로넬롤), 상처 회복(피넨)을 돕는 천연 성분이다. 그의 연고는 상처의 염증을 줄이고 인체의 자연 치유를 도왔으며 무엇보다 인간적인 치료였다. 생사가 갈리는 전쟁터에서 덜 고통스럽고 더 효과적인 방법을 찾아낸 것이다. 파레의 연고는 점차 유럽 전역에 퍼졌다. 그는 “나는 치료했고 신은 아물게 하셨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의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합리적이고 정확한 방법을 통해 최선을 다하는 태도를 말하는 표현이다.


오늘날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항생제 연고, 피부 연고, 화상 연고의 시작에는 파레의 연고가 있다. 고통을 줄이려는 염원에서 시작된 그의 연고는 근대 외과 치료제의 효시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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