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긴 빌바오] 트럼펫으로 토트넘 팬들 사로잡은 ‘리틀 소니’

지금 북(北)런던은 축구 열풍에 휩싸여 있다. 그동안 ‘무관(無冠)’의 설움에 시달렸던 토트넘 홋스퍼 팬들은 지난 21일(현지 시각) 팀이 유로파 리그 정상에 오르면서 그 한을 풀었다.
2007-2008시즌 리그컵 이후 17년 만에 우승 감격을 누린 팬들은 23일 토트넘 홋스퍼 스타디움 인근 도로에서 열린 기념 퍼레이드에 몰려와 벅찬 환호를 보냈다. 영국 현지 언론은 이날 15만명이 거리에 몰린 것으로 추정했다.
토트넘 팬들의 열정은 결승전이 열린 스페인 빌바오에서 이미 확인할 수 있었다. 경기 전날인 20일부터 토트넘 팬들은 빌바오 시내 곳곳에서 응원가를 부르고 구호를 외치며 우승을 기원했다.
응원전부터 토트넘의 하얀 물결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맨유)의 붉은 기운을 압도하는 분위기였다. 우승에 목마른 만큼 토트넘 팬들은 목이 터져나갈 듯 노래를 불렀다.
이들 사이에서 최고 인기를 끈 스타가 있었다. 토트넘은 원래 경기에 앞서 스타디움에서 트럼펫으로 응원가를 연주하며 분위기를 돋우는 것이 전통인데 한국인 트럼페터가 빌바오에서 ‘응원단장’ 역할을 한 것이다.

그는 트럼펫 전공으로 서울대 음대를 졸업하고 함부르크 국립 음악대학교에 유학을 준비 중인 손장원(24)씨. 축구 유튜브 ‘슛포러브’를 운영하는 김동준 대표가 섭외했다.
김 대표는 올여름 내한하는 토트넘의 주요 응원가를 국내 팬들에게 알려 보자는 쿠팡플레이 요청에 따라 빌바오 현지에서 트럼펫으로 응원가를 연주하는 기획을 마련했다.
그런데 이 아이디어가 ‘대박’을 쳤다. 경기 전날인 20일 빌바오 시내에서 손장원씨가 트럼펫으로 토트넘 대표 응원가인 ‘Oh When the Spurs Go Marching in(토트넘이 앞으로 나아갈 때)’을 연주하자 주위 토트넘 팬들이 일제히 ‘떼창’을 했다. 빌바오가 순식간에 북런던으로 바뀐 순간.
손씨가 연주를 마치자 팬들은 앵콜을 외쳤고, 그는 손흥민 응원가인 ‘Nice One Sonny’와 ‘Can’t smile without you, Tottenham(토트넘 없이 웃을 수 없어)’ 등을 들려줬다.
빌바오에 울려 퍼진 손씨의 트럼펫 선율은 토트넘 팬들을 한데 불러 모았다. 이 광경을 본 한 빌바오 시민이 자신의 집 2층 발코니를 내줬고, 손씨는 발코니에서 트럼펫을 불었다. 이 낭만적인 장면이 소셜미디어를 통해 퍼져나가며 큰 화제가 됐다.

토트넘 팬들은 손씨에게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고, 손씨와 사진을 함께 찍으며 기뻐했다. 한 팬이 손씨를 목말 태우자, 그는 그 위에서 트럼펫을 힘차게 불며 분위기를 달궜다. 특히 손씨가 손흥민과 같은 ‘SON’임을 알게 된 팬들은 그를 ‘리틀 소니’라 부르며 즐거워했다.
손씨의 트럼펫은 경기 당일인 21일에도 울려 퍼졌다. 경기를 앞두고 빌바오 한 공원에선 토트넘 팬 2만명이 운집한 응원 행사가 열렸는데 그는 구단 초청으로 무대에 서서 다시 트럼펫을 불었다.
전날 이미 스타가 된 그에게 팬들이 몰려들어 하이파이브를 하고, 셀카를 요청했다. 나이가 지긋한 할아버지 팬들은 손장원씨에게 고맙다며 눈물을 글썽이기도 했다.

그날 토트넘이 결국 결승전에서 맨유를 1대0으로 꺾고 우승하면서 손씨는 토트넘 팬들에게 ‘승리의 아이콘’이 됐다.
손장원씨는 “손흥민 선수로 인해 자연스럽게 토트넘 팬이 됐고, 좋은 기회가 와서 이렇게 참여하게 됐다”며 “클래식 트럼펫을 전공했기 때문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자유롭게 연주할 일이 없어 걱정이 많았는데 정말 많은 팬이 좋아해줘서 큰 감동을 받았다”고 했다.
산 마메스 스타디움에서 토트넘의 승리를 지켜본 손씨는 이번이 첫 축구 ‘직관’이라고 했다. 그는 “지난 이틀간 내 인생 최고의 공연을 펼쳤다”며 “제 부족한 연주에 뜨겁게 호응해준 토트넘 팬들이 정말 그리울 것 같다”고 말했다.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