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다 가블러' 이영애, NG 없는 무대 위에서 [인터뷰]

[티브이데일리 황서연 기자] 세월이 비껴간 듯한 우아한 얼굴 위로 삶의 허무와 권태, 진한 보랏빛 욕망이 스친다. 32년 만에 상업 연극에 도전한 배우 이영애의 얼굴은 여전히 매력적이며 때로는 처절했다. 이 얼굴을 그려내기까지 거쳤던 노력의 순간들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연극 '헤다 가블러'(연출 전인철)는 헨리크 입센의 대표작으로, 사회적 억압 속에 놓인 여성 헤다 가블러의 내면과 자유에 대한 갈망을 심리적으로 그려낸 작품이다. 이영애는 주인공 헤다 역을 맡았다.
대학원에서 연극 공부를 하며 스물넷 어린 나이에 참여했던 상업 무대를 다시 떠올렸고, 호기심 많던 시절에 만났던 연극에 대한 갈망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는 이영애. 본격적인 방송 데뷔 이후에는 영화와 드라마에 집중해 왔고, 결혼과 출산 후에는 엄마로서의 삶에 충실하며 세월이 흘렀고, 어느덧 중학생이 된 쌍둥이 아이들을 키워 놓고 나니 다시금 연기에 대한 열망이 고개를 들었단다.
그런 이영애와 연극 무대를 연결해 준 연결 고리는 그의 대학원 은사, 국내에서 '입센 전문가'로 불리는 한양대학교 김미혜 명예교수였다. 그는 은사와의 대화를 통해 헤다라는 여인에게 매력을 느끼게 됐고, 여배우로서 다양한 매력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헤다를 마음속에 품게 됐다고 말했다. 그러던 중 지난해 전도연의 연극 '벚꽃동산'을 관람했다가 LG아트센터와 인연을 맺었고, 개관 25주년 기념 작품의 러브콜을 받게 됐다. 주변의 모든 상황이 맞아떨어졌다. "마치 운명 같았다"는 그의 말대로였다.
"모르면 용감하다고, 뭘 몰라서 도장을 찍었다"는 이영애는 출연 결정을 하기까지 꼬박 한 달을 고민했다고 밝혔다. 그는 "나뿐만 아니라 많은 연기자들이 무대에는 정말 서고 싶지만 두려움을 느낀다. 내가 그 많은 대사를 다 소화할 수 있을까, NG가 나면 어떡하나. 그 고민은 지금도 내 숙제인 거다"라고 말했다.
"배우 입장에서는 제가 극을 만들어 간다는 묘미가 굉장히 커요. 무대 위에 NG가 어디 있나요. 그러니 더 노력을 해야 하죠. 무대 위에서는 저에게 향하는 조명이 드라마나 영화, CF 촬영장에서 받는 조명보다 더 큰 느낌이에요. 내 안에 스며드는 감정의 폭도 더욱 깊고, 결국은 그런 차별점들이 행복감을 주더라고요. 그 행복함과 희열을 느끼기 위해 도전하고 공부하다 보니 여기에 와있네요."

모든 극이 그렇겠지만, 특히 '헤다 가블러'는 주인공 헤다의 복잡한 심리를 이해하는데 많은 노력을 쏟아야 하는 극이다. 부유한 장군의 딸인 헤다는 무미건조한 삶에 불만을 품은 채 학자 테스만과 결혼하지만, 6개월 간의 신혼여행을 마치고 새 집으로 돌아온 지 수일 만에 극단에 치닫는 선택을 한다. '여성 햄릿'이라 불릴 정도로 복잡한 내면 갈등을 겪는 인물이다.
이영애의 공부 역시 헤다라는 인물을 파헤치는 것에서 출발했다. "처음 인물들의 관계를 들여다볼 때는 '이게 뭐지?' 싶었다. 그 길로 은사님께 3일 간 입센에 대한 특강을 들었다. 다 듣고 나서 보니 결국 헨리크 입센이 곧 헤다였다"라며 "사랑에 목말라있고, 헤다처럼 상류층이긴 하지만 가진 게 없고, 하지만 계층 아래로 내려가긴 싫고, 그런 입센을 이해하고 나니 헤다를 이해할 수 있었다"라고 말했다.
이영애는 "그래서 같은 여자로서, 결혼을 한 사람으로서, 그런 식으로 헤다에게 접근하면 캐릭터 해석이 좁아지는 것 같더라. 막말로 요즘 사회는 정 안되면 이혼하면 되는 사회 아닌가. 결혼에 속박돼 고통스러워하는 헤다에게 공감하기가 어려워진다"라고 짚었다. "헤다는 지금도 정답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라며 각박한 현대사회 속 우리를 가두는 것들, 스트레스를 주는 주변 인물이나 사회적 규범 같은 '굴레'를 떠올리며 극을 보다 넓은 관점에서 바라보기를 당부했다.
"헤다 안에 '친절한 금자씨'의 금자도 있고, '대장금'의 장금이도 있고, '구경이'의 구경이도 있다는 한 관객의 후기가 기억나요. 이영애가 표현한 인물이니 당연히 그 모습들도 있을 거예요. 제가 어딜 가겠어요. 하지만 헤다에게는 조금 더해서 고뇌감과 외로움, 처절함을 그려볼까 해요. 뒤틀린 인물의 내면을 너무 무겁지는 않게, 너무 어둡지도 않게 그리는 게 지금의 목표예요."

극 중 헤다는 아름다운 미모로 뭇 남성들의 시선을 사로잡고, 남편인 테스만에게는 하나의 트로피처럼 여겨지는 여인으로 묘사된다. 이영애의 미모가 곧 개연성이라는 관객들의 후기가 쏟아지는 이유다. 하지만 정작 그는 외적인 것에 공을 들일 시간이 없었다고 말했다. "처음에는 머리카락을 붙여볼까, 스타일은 어떻게 할까, 많은 고민을 했는데 연습을 시작하고 보니 그런 걸 고민할 시간이 없었다"라며 "연습을 하다가 내 연기만 어색해서 소위 '현타'가 온 적이 있었다. 그 뒤로는 개인적인 약속도 다 취소하고 집과 극장만 오갔다. 외모관리는커녕, 집이 이태원인데 이태원 밖으로 나가지도 못했다"라고 토로했다.
"연습 한 달 차에, 연습실에서 한 리허설 영상이 메신저 단체 대화방에 올라왔어요. 영상을 쭉 봤는데 배우들 사이에서 저만 너무 이상하더라고요. 밤새 잠을 못 자고 아침 일찍 연습실에 혼자 와서 고민을 했어요. 배우 분들을 불러서 연기를 가르쳐 달라고 하고, 연기 선생을 하고 있는 친구에게도 전화를 걸어서 조언을 구하고, 무대 연기에 대한 기술을 새롭게 익히면서 서서히 힘을 얻어갔죠. 그 시간이 없었다면 무대에 설 수 없었을 거예요."
특히나 섬세한 연기를 선보이기에는 쉽지 않은 대극장 무대라는 점이 부담이 됐다고. 이영애는 "내게 무대의 스케일을 감당할 에너지가 있을지 걱정이 앞섰다"라며 "연출님을 비롯해 기량이 쟁쟁한 모든 배우들이 함께 저를 도와주시고 가르쳐주시고 같이 해나가며 큰 기둥이 돼주셨다. 덕분에 생각보다는 호평이 나왔다"라고 말했다.
이영애는 큰 무대에서 자신의 감정을 온전히 관객들에게 전하지 못해 아쉬움을 느끼고 있지만, 대신 이를 만회할 수 있는 방법들을 고안하고 계속해서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런 그를 도운 장치들 중 하나가 바로 전인철 연출이 고안한 비디오 연출이다. 극 중 하녀 베르트(조어진)는 헤다의 감정이 극에 달한 순간, 인물 간의 갈등이 터지는 순간마다 스마트폰을 들고 나와 헤다의 얼굴을 클로즈업한다. 이 화면은 스크린을 연상케 하는 거대한 무대의 벽면에 쏘아지고, 관객들은 마치 영화 속 이영애를 보듯 그의 섬세한 표정 연기를 감상할 수 있다.
이영애는 "처음 연출님의 영상 아이디어를 듣고 '정말 좋다'라고 답했다. 뒷자리에서는 볼 수 없는 표정 연기를 보여드릴 수도 있고, 헤다의 내면을 보여주기에도 좋은 장치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 나는 카메라 연기를 오래 해왔으니 강점이 될 수도 있겠다 싶었다"라고 말했다. 이어 "결과적으로는 헤다가 대사를 할 때, 상대 배우는 스크린 속 헤다를 바라보며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연극적이어서 좋더라"며 "그간 매체 경험을 토대로 여러 아이디어를 냈다. 카메라로 어떻게 내 눈빛을 찍어야 할지, 동선은 어떻게 할지 등을 제안했는데 연출님이 대부분 반영해 주셔서 좋은 결과가 나왔다"라고 덧붙였다.

이영애가 인터뷰에 나선 것은 개막 일주일 뒤였다. 그는 인터뷰 시간 내내 흘러간 자신의 무대에 대한 아쉬운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극장까지의 거리도, 또 가격도 만만치 않은데 여기까지 공연을 보러 와주신 분들께 감사함 뿐이다. 제발 기사에 '감사하다'라는 말을 꼭 적어달라"라고 수차례 강조하기도 했다.
그는 "대사만 까먹지 말자, 팀에 누를 끼치지 말자는 마음으로 무대에 올라갔는데 너무 오랜만이라 떨리기도 했고, 준비한 것에 비하면 조금은 아쉬웠다. 제가 더 발전해서 무대를 즐길 수 있을 정도가 되면 더 좋은 연기를 보여주고 싶다는 아쉬움이 든다"라며 취재진과 관람객들에게 "여건이 되신다면 부디 다시 한번 와서 관람해 주시기를 바란다"라는 말을 반복했다.
회차를 거듭할수록 체력적으로는 힘이 부치지만 무대 위에서는 조금씩 여유를 찾아가고 있다는 이영애. 연극이 너무나 힘들지만 정말 많은 것을 배웠다는 만족감과 후련함이 공존한다는 그다. "좋다는 거 다 먹고, 남들 하는 것 똑같이 따라 하면서 정신력으로 버티고 있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니 그게 가장 큰 영양제가 아닌가 싶다"라며 연극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
"다음 연극이 있다면 조금은 더 열심히, 잘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감이 생겼어요. 그동안의 작품을 너무 쉽게 한 것이 아닌지 스스로 반성도 하게 됐고, 힘들지만 연극의 매력에 푹 빠지게 됐죠. 가족이 가장 중요하지만, 그 안에서 중심을 잘 잡으면서 배우로서 다양한 것을 시도해보고 싶어요. 당장 여건이 되지 않더라도 새 연극도 찾게 될 것 같고요. 무대 위에서 오롯이, 내가 배우라는 것을 느낄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헤다 가블러'는 6월 8일까지 서울 강서구 LG아트센터 서울에서 공연한다.
[티브이데일리 황서연 기자 news@tvdaily.co.kr / 사진=LG아트센터]
이영애 | 헤다 가블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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