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러진 어르신 입에 약 밀어 넣어···의사 없는 곳서 주민 살리는 간호사
⑥강원 고성 아야진보건진료소 김영남 소장
외딴 지역 주민들 건강 지키는 의료안전망
간호사 1인 근무, 만성질환 관리·보건 교육
"임종 간호 등 지역사회 돌봄 문제 고민해야"
편집자주
전문적이지 않은 직업이 있을까요? 평범하고도 특별한 우리 주변의 직장·일·노동. 그에 담긴 가치, 기쁨과 슬픔을 전합니다.

시골 마을에서 한 어르신이 쓰러졌다. 간호사가 연락을 받고 달려갔을 땐 이미 몸이 뻣뻣하게 굳어 가고 있었다. 간호사는 협심증을 의심했고, 마침 협심증 약을 복용하던 이웃을 기억하고는 다급히 전화해 약을 가져다 달라고 부탁했다. 그 약을 환자의 닫힌 치아 틈새로 밀어 넣었다. 다행히 119가 도착하기 전 환자 의식이 돌아와 큰 병원으로 안전하게 이송됐다.
이렇게 사람을 살린 간호사는 김영남(56) 아야진보건진료소장이다. 김 소장은 “혈관확장제는 간호사가 쓸 수 있는 약은 아니지만, 법이고 뭐고 당장 눈앞에서 죽어 가는 사람을 살려야 한다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고 돌아봤다. 오랜 경험에서 비롯된 의학적 판단력뿐 아니라 평소 주민과 가깝게 소통하며 개개인의 건강 상태까지 속속들이 알고 있었기에 살릴 수 있던 생명이다.
김 소장은 지난 18일 한국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오랫동안 주민을 돌보면서 진료소가 동네 사랑방이 됐다”고 웃으며 “주민들 건강이 좋아지는 모습을 볼 때 가장 큰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간호사 1인이 책임지는 보건진료소 1900곳
의사가 없는 곳, 의사가 오지 않는 곳에서 주민들의 건강을 책임지는 보건진료소는 전국에 1,900여 곳에 이른다. 김 소장이 근무하는 아야진보건진료소는 강원 고성군 토성면 아야진 해변 마을 어귀에 자리 잡고 있다. 이곳에선 날마다 애정 어린 잔소리가 흘러넘친다.
“어르신, 끼니 거르지 마시고 약 꼬박꼬박 잘 챙겨 드셔야 해요. 그래야 빨리 낫죠.”
“응, 내가 아들 말은 안 들어도 우리 소장님 말은 잘 듣지. ‘숙제’ 잘해 올게요.”
도시인에겐 낯선 보건진료소는 어떤 곳일까. 시군에는 보건소, 읍면에는 보건지소가 있고, 각 리 단위에는 보건진료소가 있다. 고성을 예로 들면 고성군보건소, 토성보건지소, 아야진보건진료소로 이어지는 구조다. 병원이 없는 농어촌과 섬마을 등 오지나 외딴 지역 주민을 지키는 최후의 의료안전망 역할을 한다.
보건소와 보건지소에는 공중보건의가 파견되지만, 보건진료소는 의사 없이 간호사 한 명이 책임진다. 경미한 진료와 기본적인 약 처방, 예방 접종, 보건 교육, 건강 상담 등을 담당한다. 김 소장은 간호사 면허를 취득한 직후인 1991년 강원 영월 보건진료소에 첫 부임한 이래 35년째 보건진료소장으로 일하고 있다. 그중 32년을 고성에서 지냈다.
“햇병아리 시절 선배를 만나러 평창 보건진료소에 갔다가 아름다운 자연 풍경에 반했어요. 일도 하고 전원생활도 누릴 수 있을 거란 낭만적인 생각으로 선택한 일인데, 열심히 일하다 보니 어느새 사명감이 생기더라고요.”

주민들의 몸뿐만 아니라 마음도 돌본다
여느 농어촌 마을이 그렇듯 주민 대다수가 노인이라, 고혈압, 당뇨, 고지혈증 등 만성질환자가 많다. 진단과 약 처방은 의사가 하는 게 원칙이지만, 환자에게 특별한 이상 소견이 없으면 진료소장도 기존 의사 지시서에 따라 약을 처방·조제할 수 있다. 증상이 가볍지 않거나 응급이라고 판단되면 전문 진료를 받을 수 있는 병원으로 즉각 보낸다.
김 소장은 진료소가 ‘돌봄의 감각기관’이라고 생각한다. 돌봄은 ‘관계’에서 시작된다. 그래서 거동이 불편하거나 일상생활 관리를 못하는 주민, 우울증으로 사람들과 접촉을 꺼리는 주민을 위해 방문 진료도 자주 한다. 외롭게 혼자 사는 노인들에게는 김 소장이 다정한 말벗이자 심리 상담사이기도 하다. “저를 붙잡고 자식 자랑도 하고 옛날 고생했던 일을 얘기하면서 많이들 우셔요. 그렇게 한참 울고 나면 마음이 정화되거든요. 주민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것도 제가 해야 할 일이죠.”
농작물·수산물 들고와 감사 전하는 주민들
주민들도 몸이 아플 때는 물론이고 정이 고플 때에도 진료소를 찾는다. 안마의자, 찜질팩, 마사지기를 이용하러 들르는 환자 아닌 환자도 많다.
김 소장을 믿고 의지하는 주민이 많아 진료소는 문턱이 닳을 지경이다. “핸드폰 작동이 안 된다” “고지서 내용 좀 봐 달라” “지원금 신청을 도와 달라”며 오기도 한다. 딱히 물어볼 곳도, 도움받을 곳도 없는 노인들 사정을 모르지 않으니 김 소장은 흔쾌히 손길을 내민다.
주민들도 직접 기른 농작물이나 간식거리로 고마움을 전한다. 뱃일을 하는 한 주민은 갓 잡은 꽃게를 양손에 가득 들고 오기도 했다. 전국보건진료소장회 회장을 맡고 있는 김 소장은 지난달 보건의 날 기념식에서 국무총리 표창을 받았다. 어디에 얘기한 적도 없는데 동네에 큼지막한 축하 현수막이 걸렸다. 김 소장은 “쑥스럽다”며 얼굴을 붉혔다.
물론 고충도 있다. 진료부터 행정 처리까지 업무량이 상당하고, 의료 인프라가 부족하다 보니 휴가를 가도 주민들 걱정에 휴대폰을 손에서 내려놓지도 못한다. 혼자 모든 걸 책임져야 한다는 부담감과 압박감 탓에 동료와 함께 팀으로 일하는 게 소원인 적도 있었다.

의사가 오지 않는 곳, 간호사 역할 확대해야
요즘에는 ‘임종 간호’를 고민하고 있다. 웰다잉은 지역사회가 당면한 과제다. 실제로 요양원이 아니라 평생 살아 온 집에서 마지막을 맞이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 김 소장도 임종을 앞둔 환자를 돌본 경험이 많다. 하지만 간호사는 사망 진단을 할 수 없어 실질적인 도움을 주기가 어렵다.
김 소장은 일본을 예로 들었다. 일본에서는 의사가 먼 곳에 있는 경우 간호사가 환자의 호흡 정지, 동공 상태, 외상 유무 등을 확인한 뒤 사진과 데이터를 스마트폰으로 의사에게 보내면 의사는 원격으로 사망 판정을 할 수 있고, 간호사도 의사 지시에 따라 사망진단서를 대필하는 등 임종 처리를 할 수 있다고 한다.
“한국도 제도 보완이 시급합니다. 의사가 안 오는 곳, 의사가 없는 곳에서도 돌봄은 필요해요. 재교육을 거쳐 진료소장의 권한과 역할을 조금만 넓혀 줬으면 좋겠어요. 환자의 마지막까지 그 곁을 지키고 싶습니다.”
김표향 기자 suza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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