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범하지 않지만 눈에 띄길 바라"... 뜨는 'MZ 시인'의 속마음은

권영은 2025. 5. 24. 0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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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선경 첫 산문집 '내 꿈에 가끔만 놀러와'
고선경 시인이 22일 서울 중구 한국일보에서 자신의 첫 산문집 '내 꿈에 가끔만 놀러와'를 들어 보이고 있다. 남동균 인턴기자

"시의 효능에 대해 골몰한다// 감동 그리고 따뜻한 시선과 관심……/ 받겠냐?// 내 시에 비타민이나/ 식이섬유가 함유돼 있지는 않아"('건강에 좋은 시')

2022년 등단하고 이듬해 펴낸 첫 시집 '샤워젤과 소다수'로 장안의 화제가 된 신예 시인 고선경(28)의 세계를 지배하는 건 유머다. 첫 시집에 수록된 위의 시는 그의 인장이 찍힌 시. 자조적 유머조차 차원이 다르다. "되게 큰 사랑의 마음"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고 시인은 22일 한국일보와 만나 "유머에는 결정적인 순간에 우리를 삶 쪽으로 끌어당기는 힘이 있다고 믿는다"며 "자조하든 남을 웃기고 싶은 마음이든 유머는 계속해서 삶에 발 딛고 설 수 있는 힘이 된다"고 했다. "근데 봤지 엄마/ 쟤가 나 보고 웃었어"


가장 주목받는 신예 시인의 첫 산문집

이번에는 시 대신 산문이다. 그가 2021년부터 운영해온 블로그에 썼던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에 새로 쓴 원고를 한데 묶은 첫 산문집 '내 꿈에 가끔만 놀러와'가 최근 출간됐다. 자주 오라는 무거운 청 대신 가끔만, 그냥 놀러오라고 눙치고서는 최선을 다해, 치열하고 절박하게 쓴 이야기를 꾹꾹 눌러 담았다.

내 꿈에 가끔만 놀러와·고선경 지음·문학동네 발행·252쪽·1만6,800원

그가 앞서 펴낸 시집 2권과 함께 읽으면 재미는 배가 된다. 행과 행 사이 의도된 공백을 산문이 메꿔주면서다. "아 지긋해 아 영원해/ 모두가 귀엽고 비정해"('파르코 백화점이 보이는 시부야 카페에서')라는 시구를 썼던 일본 도쿄 여행기에서 시인은 소격감을 토로하지만, 독자로선 어쩐지 그와 한발짝 더 가까워진 느낌이다. 당장 구글맵에서 시부야의 카페를 찾아 별을 찍어뒀다. 예전 일기에 쓴 '세제'를 '세계'로 잘못봤다는 대목에 이르면 그의 시 '메론소다와 나폴리탄'이 떠오른다. "성실이라는 단어를 상실이라고 읽었다/ 왜 우리는 시간을 잃어버리는 데에만 성실한 걸까"

시 잘 쓰는 사람이 산문도 잘 쓴다는 말이 있듯 에세이 그 자체로도 힘을 갖는다. 'MZ 시인'답게 청년 세대를 대변하는, 나아가 세대를 아우르며 공명하는 이야기의 힘이다. 그는 '크림소다월드'라는 제목의 블로그에 '안전하게' 글을 써왔다. 인스타그램과 달리 블로그는 반드시 접속해야만 게시물을 볼 수 있다. "누군가에게 보여주는 일이 조심스럽지만 그럼에도 접속의 과정을 거쳐 나를 알아줄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 때문에 계속"하는 일. 자아 노출증과 대인기피증을 오가는 '소심한 관종'스러운 그의 면모는 현대인의 초상이기도 하다. "나는 비범하지 않으면서 눈에 띄기를 바랍니다/ 돌연사를 해서라도 말이지요"('살아남아라! 개복치')

고선경 시인의 첫 시집 '샤워젤과 소다수'와 올해 1월 출간된 '심장보다 단단한 토마토 한 알'은 '텍스트힙' 열풍을 주도하고 있다.

"구체적인 사랑을 정확하게 쓰고파"

애정과 인정을 갈구하는 시인의 모습에선 또 다른 자아를 찾은 기분이다. 망할 것 같아서 그만두고 싶은 마음과 더 잘하고 싶은 마음이 줄을 탄다. 그는 "출간을 앞두고 한 달 전부터 엄청난 압박감에 시달린다"며 "너무너무 두렵고 걱정스러운 마음에 '이렇게 내가 계속해서 책을 펴내는 게 맞나'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라고 했다. 그런데도 울면서 해낸다. 계속 쓰고자 한다. "모르겠어요. 시를 왜 그렇게 좋아했을까."

소설가가 되고 싶어 문예창작학과에 진학한 그는 시 창작 수업 첫날, 김행숙 시인의 '미완성 교향곡'에 매료돼 시에 애정을 품었다. 등단 전 백수 시절을 거쳐 현재 "'전업 시인'에 도전 중"이다. "어떻게 해도 세상과 연결돼 있다는 감각이 시를 쓰게 한다"고. "세상은 하나도 아름답지 않고 절망적이며 때로는 좌절케도 하지만 어떻게 해도 내가 세상과 분리될 수 없는 존재라면 세상을 사랑해 버리는 편이 오히려 효율적이지 않을까요. 그래서 시를 씁니다. 시는 제가 생각하는 가장 성실한 사랑의 행위거든요."

고선경 시인은 첫 산문집 '내 꿈에 가끔만 놀러와'의 '나가는 글'에 "너무도 찰나여서 영원에 가까운, 반짝반짝 허무한 나의 이십대. 이것을 여기에 남겨두기로 한다"고 썼다. 남동균 인턴기자

예컨대 슬픔에 대해서도 '아, 슬프다'가 아니라 "물에 불은 나무토막, 그 위로 비가 내린다"(진은영·'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라고 더 적확하게 표현할 줄 아는 게 그가 생각하는 시다. 그는 "특히 내가 좋아하는 것에 대해 왜 좋아하는지 정확하게 쓰고 싶다"며 "시라면 미문을 써야 할 것 같고, 좀 더 진지한 고찰과 사유가 들어가야 될 것 같지만, 감정을 정확하게 표현하는 시를 쓰고 싶은 게 저의 가장 소박한 목표"라고 했다.

그는 세 번째 시집의 내년 출간을 목표로 "좀 더 구체적인 사랑"에 대해 쓰고 있다. 12월에는 난다출판사의 '시의적절' 시리즈를 통해 또 다른 산문집을 선보일 예정이다.

권영은 기자 you@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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