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판 읽을 줄 알면 OK, 일본어 못해도 여행이 즐거워집니다
‘일식 메뉴판 해석학’ 쓴
낭만 닥터 배상준
외과 전문의 배상준(55)씨는 10년 전 자신의 블로그(낭만닥터 SJ)에 ‘대한항공·아시아나 일등석 탑승기’를 올리면서 여행 전문가로 유명해졌다. 돈은 한 푼도 쓰지 않았다. 대신 평생 모은 항공 마일리지를 털어 일등석에 앉았다. “와인은 어떤 걸로 하시겠습니까” 하고 승무원이 묻자 그는 답했다. “다 깔아주세요!” 이 체험기는 소셜미디어(SNS)에서 폭발적 화제를 모았다.
건장한 남성인데 “몸이 약해 맥주를 좋아한다”고 우기며 ‘맥주 마시며 인문학’이란 주제로 대학과 기업에서 강의를 한다. 독일 맥주 여행기를 썼던 그가 이번에는 ‘메뉴판 해석학’이라는 희한한 책을 펴냈다. 해석 대상은 그가 가장 즐겨 여행한다는 일본의 음식들. 배씨는 “일본어를 몰라도 식당 간판과 메뉴판을 읽을 수 있다면 일본 여행이 몇 배 더 즐거워진다”고 했다.
◇회화는 포기, 음식 이름만 외운다
그는 “일본어를 거의 모른다”고 했다. “고교 때 제2외국어로 일본어를 배운 덕분에 히라가나와 가타가나를 더듬더듬 읽고 인사말을 겨우 알아듣는 정도지요.”
-그래도 지인들은 함께 일본 여행하는 걸 좋아한다면서요.
“일본어 회화는 불가능해도 식당 간판과 메뉴판을 읽고 음식과 술을 편하게 주문해 먹고 마실 수 있으니까요.”
-비법이 뭡니까.
“명사를 외우는 겁니다. 메뉴판에 적힌 음식 이름이 다 명사잖아요.”
-회화를 포기하고 명사만 외우기로 한 계기가 있나요.
“15년 전 대학 동기들과 아이들 데리고 도쿄 디즈니랜드 갔어요. 놀이기구 안내 직원이 ‘난넨사마데스카(몇 명입니까)?’ 물었는데 하필 이 말이 들린 겁니다. ‘난메이사마데스까’를 잘 못 들은거죠. 좀 아는 척하고 싶어서 자신 있게 ‘로쿠징(여섯 명)’이라고 했습니다. 이것도 ‘로쿠닝’이 맞았었지요. 그러자 직원이 빠른 일본어로 설명하는 거예요. 한마디도 못 알아들었죠. 동기들이 화를 냈어요. 다시는 일본어 잘하는 척하지 않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래도 회화를 잘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요.
“학창 시절 영어 공부도 열심히 안 하던 사람이 일본 여행 재미있게 다니려고 일본어 공부를 열심히 한다? 그 가능성은 극히 낮아요. 일본 미녀와 사귄다면 모를까, 그건 다음 생에 고려해보는 걸로(웃음). 명사만 외우는 게 현실적입니다.”
-음식과 관련된 단어가 엄청 많지 않나요.
“우리가 먹는 채소가 수십 가지 될 것 같잖아요? 그런데 마트에 장 보면 10개 정도예요. 고기도 소, 돼지, 닭이죠. 기니피그 같은 건 먹지 않잖아요, 하하. 식재료가 의외로 다양하지 않습니다. 삶기, 굽기, 볶기, 끓이기 등 조리법도 10가지 정도고요. 일식 재료와 조리법 명사 50개만 외우면 충분합니다. 단, 히라가나와 가타카나는 읽을 수 있어야 하고요.”<표 참조>
-고급 코스 요리인 가이세키 메뉴판으로 시작하라고요?
“라멘, 우동, 스시 등 쉽게 먹을 수 있는 음식도 많은데 구태여 비싼 가이세키부터 소개하는 이유는 가이세키 요리 리스트에 일식 조리법 이름이 많이 등장해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접미사 ‘모노(物)’가 붙은 단어가 많은데요, 모노는 사물·물건을 뜻하지만 조리법에 붙는 모노는 ‘음식’이라는 뜻이죠.”
-쉽게 외우는 비결이라면.
“일본어로 조림은 ‘니모노(煮物·にもの)’라고 합니다. 삶을 자(煮)를 쓰지요. ‘불 화(火)+사람 자(者)=삶을 자(煮)’, 불에 사람을 삶는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물론 말도 안 되는 소리죠. 하지만 연상법은 그렇게 외워야 평생 기억합니다.”
-생선 이름, 닭 부위까지 외워야 합니까.
“스시 먹다가 매번 구글 검색하는 것보다 외워 두면 훨씬 편해요. 야키토리 가게에서는 ‘이렇게까지 구분해 먹을 필요가 있나’ 싶을 정도로 부위를 나눕니다. 구구단처럼 그냥 외우면 돼요. ‘태정태세문단세~’ 27글자도 암기하던 분들이 왜 걱정하십니까.”
◇일본에선 프랑스 요리를 꼭 드세요
다양한 일본 음식의 유래와 먹는 법, 주문하는 요령은 물론 음식이 일본 여행의 목적인 여행자들을 위한 정보도 상세하게 책에 담았다.
-참치를 뜻하는 ‘마구로(まぐろ)’가 검다는 의미라고요?
“참치 살은 빨갛지만 마구로의 어원은 ‘새까맣다’입니다. 검다(黒·쿠로) 앞에 강조하는 의미의 참 진(真)을 붙여 맛쿠로(真っ黒)라 부르던 것이 마구로가 됐죠. 원양 어선이 없던 시절 우연히 근해에서 잡은 참치가 살이 금방 까맣게 변질돼 먹기 애매해져 그런 이름을 붙였다고 합니다.”
-에도(도쿄의 옛 이름)에서 탄생한 니기리즈시가 전국을 제패한 계기가 둘 있었다고요.
“스시는 김으로 만 마키즈시, 각종 재료를 밥 위에 흩뿌린 치라시즈시, 밥과 재료를 누름틀에 담아 누른 오시즈시, 손으로 쥐어 만드는 니기리즈시가 있습니다. 이 중에서 니기리즈시가 스시의 대명사가 된 첫 사건은 1923년 관동 대지진입니다. 일자리를 잃은 스시 장인들이 고향으로 돌아가 도쿄에서 만들던 니기리즈시를 팔기 시작했습니다. 두 번째 사건은 패전 후 쌀이 부족해 1947년 정부가 내린 ‘음식 영업 긴급 조치령’입니다. 대부분의 음식점 영업을 금지했어요. 도쿄 스시 가게 주인들이 ‘손님이 쌀을 가져오면 스시를 쥐어 팔게 해달라’고 건의했어요. 시청은 1인당 쌀 1홉, 1홉당 스시 10개라는 조건으로 허락해줬습니다. 이 조건으로 만들 수 있는 스시는 니기리즈시밖에 없었죠. 쌀 1홉은 180mL, 무게는 150g입니다. 밥을 지으면 수분을 머금어 300g 조금 넘지요. 스시 한 개당 30g이니 한입에 먹기 불편했을 겁니다. 거의 주먹밥 수준인 스시를 둘로 쪼개 먹기도 했을 텐데, 그 흔적이 회전초밥집에서 한 접시에 같은 스시 2개를 주는 관행으로 남았습니다.”
-우동과 소멘(소면), 소바는 어떻게 같고 다른가요.
“밀가루, 물, 소금을 반죽해 굵게 자르면 우동, 가늘게 자르면 소멘(素麵)입니다. ‘흴 소(素)’예요. 굵기가 가늘다는 의미의 소면(小麵)이 아닙니다. 귀신이 입는 하얀 소복(素服)의 소와 같은 한자입니다. 소바는 메밀, 메밀로 만든 면, 메밀면으로 만든 면 요리를 모두 의미합니다. 메밀 100% 소바를 주와리소바(十割蕎麦)라고 부릅니다. 찰기가 없는 메밀만으로 면을 만들면 툭툭 끊어져 밀가루를 섞기도 해요. 밀가루 20%와 메밀 80%로 만든 소바는 2:8 소바라는 의미로 니하치소바(二八そば)라고 합니다.”
-라멘을 ‘추카(中華)소바’라고 부르기도 하던데.
“라멘의 옛 이름입니다. 야키소바, 오키나와 소바도 메밀면이 아닌 밀면을 사용하지요. 소바가 모든 국수를 아우르는 면 요리의 대명사로 쓰이기 때문입니다.”
-라멘집에서 곱빼기를 시키려면 뭐라고 말해야 하나요.
“곱빼기는 ‘오오모리(大盛り)’입니다. ‘크게(大) 담음(盛り)’이라는 뜻이죠. 돼지뼈로 육수를 끓여낸 돈코츠라멘 가게에서는 ‘가에다마(替玉)’라는 표현을 씁니다. 돈코츠라멘은 면발이 가느다랗잖아요. 초창기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팔던 음식이라 빨리빨리 삶아내려고 가는 면을 사용한 거예요. 그런데 가느다란 면은 곱빼기를 주면 다 먹기 전에 퍼져버리는 단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면을 따로 더 삶아 주는 관습이 생겼어요. 접시에 내오는 추가 면을 구슬(玉·다마)로 표현해 ‘구슬을 교체(交替)한다’고 한 거죠.”
-면식(麵食) 여행 목적지로 나고야와 모리오카 두 도시를 꼽았습니다.
“다른 지역에 없는 특별한 면을 먹겠다면 나고야와 모리오카가 답입니다. 나고야 면 요리에는 미소니코미우동, 기시멘, 앙가케스파게티, 타이완라멘, 타이완마제소바가 있습니다. 미소니코미우동은 핫초미소(八丁味噌) 된장을 육수에 넣고 끓인 냄비 우동의 일종입니다. 기시멘은 칼국수처럼 납작하게 뽑은 면을 사용해요. 앙가케스파게티는 전분을 넣어 걸쭉하게 만든 구수한 소스에 스파게티 면을 비벼 먹습니다. 타이완라멘은 나고야에 정착한 화교 2세가 대만에서 흔히 먹는 담백한 담자면(担仔麺)에 고추·마늘을 듬뿍 넣어 매콤하게 변형시켰어요. 타이완마제소바는 타이완라멘에서 파생한 비빔면입니다.”
-모리오카에서만 먹을 수 있는 면 요리라면.
“모리오카완코소바, 모리오카자자멘(자장면), 모리오카레멘(냉면)이 있습니다. 완코(椀こ)는 작은 공기입니다. 10g 정도의 소바가 담겨 나오죠. 한 번에 15개씩, 배가 불러 그만 먹겠다고 할 때까지. 성인 남성이 보통 60공기를 먹는다고 합니다. 모리오카자자멘은 원조로 꼽히는 ‘빠이롱(白龍)’ 창업자가 중국 만주에서 일할 때 먹던 자장미엔을 떠올리며 만들었다고 해요. 춘장이 없어 미소에 고기, 참깨, 표고 등을 섞어 볶아 소스를 만들었어요. 한국 짜장면보다 덜 달고 덜 기름져요. 모리오카레멘은 1953년 함흥 출신 양용철씨가 개발했습니다. 꿩을 구하기 힘들어 소뼈와 닭 육수를, 동치미 대신 김치를 넣은 국물에 밀면을 사용해 만들죠.”
-일본 가면 프랑스 요리를 꼭 먹으라고요?
“어느 도시에 가든 프랑스 요리 식당을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일본은 세계에서 가장 싸고 맛있는 프렌치 요리를 먹을 수 있는 나라입니다. 저는 맥주가 비싸지 않은 곳을 좋아해요. 약골이라 와인을 마시면 빨리 취해서(웃음). 아오모리현 히로사키(弘前)시는 사과만큼이나 프랑스 요리로 유명합니다. 제주 서귀포, 경기도 포천과 비슷한 인구 16만명 도시에 10개는 족히 되는 프랑스 레스토랑이 영업해요. 그곳에 머문다면 이자카야나 밥집 대신 매일 저녁을 프랑스 레스토랑에서 먹을 것을 강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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