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없는 옛 친구처럼 수줍고 온순한 맛
[정동현의 pick] 불고기
부산에 내려온 아버지는 구두를 팔고 어머니는 구두 가죽 재단 밑준비를 했다. 오륙도가 보이는 영도의 옥탑방이 어머니의 작업실이었다. 거기서 어머니는 분필로 가죽 위에 도면대로 선을 그어 공장에 넘겼다. 나와 동생은 어머니 옆에서 작업을 구경하다가 가죽 심부름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영도 신선동에 있던 구두 공장 직원들도 두어 달에 한 번 회식을 했다. 사장이었던 큰이모부는 인부들을 이끌고 영선로터리 근처에 있는 ‘영선불고기’에 가곤 했다.
남자들은 큰 방 끝에 몰려 앉아 담배를 피우며 소주를 마셨다. 그때는 직원 식구들도 모두 회식에 왔다. 여자와 아이들은 문 쪽 끝에 앉아 사이다와 콜라를 마시며 전골처럼 끓여 나오는 불고기를 먹었다. 육수를 낙낙히 부어 간간하고 달큼했던 불고기는 아이도 어른도 입에 맞았다. 몇 판을 갈아가며 불고기를 먹노라면 남자들의 얼굴은 점차 붉게 달아오르고 목소리도 커졌다. 나와 동생은 불편한 양반다리에 몸을 비비 꼬면서 파절이와 김치로 만든 볶음밥을 철판에서 긁어먹었다. 아직도 ‘영선불고기’는 영도에 있다. 얼마 전 그곳에 다녀온 동생은 맛이 여전하다고 했다.
동생이 오래전 기억을 더듬던 무렵, 나는 을지로 4가에 있는 ‘보건옥’을 다시 찾았다. 이 집은 을지로 재개발이 시작되기 전, 강북으로 출근하던 무렵부터 다녔다. 내가 알던 사람들이 지금보다 조금 더 앳된 모습일 때, 봄비가 내리면 설레던 시절이었다. 예전처럼 을지로 4가 역에서 나와 청계천으로 걸었다. 여기가 맞나 싶을 정도로 조금은 어둡고 비좁은 틈으로 몸을 돌렸다. 마치 옛 사진을 보는 것처럼 하나도 변하지 않은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주황색 바탕에 하얀 글씨로 ‘보건옥’이라고 쓴 간판이.
문을 여니 바로 앞쪽에서 여전히 고기를 썰고 있는, 작은 몸에 손목이 가늘지만 큰 칼을 놓지 않는 주인장이 서 있었다. 단번에 나를 알아보는 주인장의 눈매는 동그랬고 카랑카랑한 목소리는 다정했다. 2층에 올라가자 낮은 천장에 윤이 나는 테이블이 쭉 놓여 있었다. 메뉴도 변하지 않았다. 고기를 직접 다루는 집인지라 육회와 육사시미, 불고기와 삼겹살까지 사람 따라 취향 따라 고르려면 부족함이 없었다. 자리에 앉으니 반찬이 먼저 깔렸다.
고춧가루에 무친 콩나물, 신맛이 올라오는 파김치, 매콤하게 볶은 멸치볶음이 수북이 쌓였다. 여전히 살가운 직원들이 시골집에 찾아온 식구 대하듯 주문을 받았다. 먼저 불고기가 올라왔다. 얇게 저며서 양념에 재운 소고기가 금방 익어갔다. 고기가 뭉치지 않게 살살 저어가며 굽는 것이 기술이라면 기술이다. 핏기가 살짝 가실 정도로 익힌 뒤 입에 넣었다. 불고기라면 응당 있어야 할 단맛이 먼저 느껴졌다. 그 맛은 말 없는 친구처럼 수줍고 온순했다. 과감하고 거침없다기보다 이 정도면 될까? 너무 달지는 않을까? 조심스럽고 신중한 마음이 담겨 있었다. 구수하게 빈틈을 채우는 간장의 짭짤한 맛은 부엌 어두운 곳에서 삭힌 장아찌를 먹는 것 같았다. 자리를 채운 사람들은 집에 온 것처럼 커다랗게 상추쌈을 만들어 먹었다.
담백하니 불고기를 먹고 나니 삼겹살이 당겼다. 분홍빛이 차분히 올라오는 삼겹살을 불판에 가득 올렸다. 기름을 튀겨가며 삼겹살이 익어갔다. 파김치를 삼겹살에 감아 먹었다. 상추에 삼겹살 두세 조각을 올리고 쌈을 쌌다. 볼이 불룩해졌지만 익숙한 사람들 앞이라 집처럼 편안했다. 옆 테이블에는 오랜만에 모인 옛 직장 동료들인 듯, 반가운 인사와 목소리가 뒤섞여 사방에 퍼졌다.
이 집에서 사람들은 공작을 하듯 목소리를 낮추고 억지로 맞장구를 치는 어색한 웃음을 짓지 않는다. 대신 잘 살고 있었는지 안부를 묻고 아이들처럼 서로를 놀리며 유치한 농담을 한다. 우리가 얼마나 잘 맞았는지, 함께 있어서 얼마나 좋았는지 추억하고 감탄하며 잔을 건넨다. 그럴 때 불고기만 한 음식이 없다. 묵은 파김치와 멸치볶음만 한 안주가 없다. 너 같은 사람도 없다. 우리는 우리라서 그때도 지금도 좋았다.
#보건옥: 김치찌개 1만원 (2인 이상), 불고기 150g 2만원, 삼겹살 150g 1만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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