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데이 칼럼] “한국은 협상카드가 많다”

우리 내부에서는 우려가 크지만, 한 발짝 떨어져 트럼프 행정부 입장에서 한국을 보면 협상 카드가 많다는 의미가 이해가 된다. 트럼프 2기 행정부의 최초 협상 타결인 5페이지짜리 미·영 간 합의문을 보면 사실 단조롭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미국에 쇠고기·에탄올 등 시장 개방을 하고 자동차 25% 관세 예외로 10만 대 쿼터를 설정하는 등 뭔가 참신한 새로운 것이 없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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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달 새 정부 출범 후 미국과 협상
기존 수세형 협상서 공수병행 해야
오히려 시간에 쫓기는 것은 미국
AI 등 디지털 분야 협력 강화 필요
」

다음 달 4일 새 정부가 출범하면 트럼프 행정부가 예고한 7월 8일 상호관세 유예기간까지 35일이 남는다. 새 정부가 미국과의 본격 협상에 앞서 짚어봐야 할 몇 가지 사항이 있다.
우선 이번 협상의 본질은 단순히 관세율을 몇 퍼센트 낮추는 협상이 아니라, 향후 4년간 한·미 경제협력의 구조적 틀을 새로이 짜는 중차대한 협상이라는 점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현재까지 미 측이 원하는 어젠다에 대한 수세형 협상에 초점이 맞춰졌다면 우리가 필요로 하는 어젠다도 적극 제기하는 공수 병행 협상으로 전환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 창조적이자 종합적 접근이 필요하다.
인공지능(AI) 디지털 분야 협력이 좋은 사례이다. 얼마 전 실리콘밸리에서 여러 AI 스타트업과 벤처캐피털을 만난 필자는 한국이 AI 레이스에서 크게 뒤처져 있음과 함께, 새 정부에서의 AI 육성을 위해서는 한·미 간 AI 디지털 파트너십을 적극 활용해야 함을 확인할 수 있었다.
트럼프 대통령의 중동 순방 시 아랍에미레이트(UAE)가 엔비디아의 AI 칩 50만 장을 매년 구매한다는 딜을 하던 비슷한 시기에, 우리 과학기술부 장관은 실리콘밸리를 방문해 AI 칩 1만 장 구매를 발표했다. 50만 장 대 1만 장. 이런 소규모 개별적 구매, 단발성 행사는 도움이 안 된다. 향후 5년여 새 정부 및 기업들이 구매할 AI 칩 수십만, 수백만 장을 총괄해서 최대한 큰 규모로 만들어, 한·미 AI 디지털 파트너십의 협력 프로그램이자 우리의 무역흑자를 줄이는 일거양득 방안으로 한·미 협상의 틀 내에서 패키지로 활용해야 한다.
최근 미국 빅테크 기업들이 동남아에 수십억 달러 규모로 투자한 것에 비해 한국에 대한 투자 소식은 들리지 않는다. MS·알파벳·아마존 3개 기업이 올 투자액만도 2600억 달러, 우리나라 전체 연구개발 예산의 10배가 넘는 천문학적 규모이다. 규모의 경제로는 우리가 당할 수가 없다. 한국의 AI가 캐치업할 수 있는 방안은 미국의 빅테크 기업들의 한국 투자 및 데이터 센터 설립 등을 유도하고 미국의 AI 에코 시스템과 협력하며 한국이 잘할 수 있는 틈새 분야를 찾고 아시아의 AI 테크 허브화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한·미 간 디지털 분야의 고속도로가 필요하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의 전자상거래 분야는 스마트폰이 보급되기도 전에 만들어진 낙후된 협정이다. 일본은 트럼프 1기 때 미·일 간 높은 수준의 디지털협정을 맺었다. 우리도 미국에 한·미 디지털협정 체결, 혹은 미·일 디지털협정에 가입함으로써 한·미·일 디지털 시장을 통합하는 것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우리 내수시장은 작으나 K-스타트업들이 미·일 시장에 진출해서 성공하게 되면 거의 20배 규모로 대박이 날 수 있다.
이렇게 새 정부가 큰 그림을 새롭게 그리며 협상을 하기 위해서는 새 정부 출범 후 미 측에 새로운 이슈를 제기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금부터 열어 놓아야 한다. 지금은 대미 협의보다는 국내 준비에, 새 정부로의 협상 바통 터치가 원활히 되도록 하는 게 바람직하다.
시간에 더 쫓기고 있는 것은 미국이다. 최근 무디스는 미국 신용등급을 내렸고 트럼프의 가장 중요한 공약인 감세안은 의회에서 진통을 겪고 있다. 불황 가능성에 대한 시장의 우려가 상존하고 주요국과 명실상부한 “딜”이 가능할지 시장이 촉각을 세우고 있는 상황이다.
따라서 새 정부는 쫓길 필요 없이 양국 간 윈윈의 딜을 만든다는 건설적 목표 하에 당당하게 협상에 임할 필요가 있다. 한국의 특수 상황은 미 측에서도 충분히 이해가 가능할 것이다. 미국 상황이 한 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불확실성이 크므로 7월 초 미국 시장과 정치 상황을 지금 예단할 필요는 없다. 일본이 먼저 타결한다는 것을 가정할 때 일본의 협상 결과도 참조할 필요가 있다.
최근 글로벌 투자가들이 서서히 한국 시장을 다시 주목하고 있다. 새 정부가 출범해 한국의 정치·경제적 불확실성이 걷히면서 이제는 한국 경제가 바닥을 치고 올라가기를 기대하는 탓이다. 이번 한·미 협상을 “한국이 돌아왔다(Korea is Back)”는 것을 국제사회에 널리 알리는 기회로 적극 활용해야 할 것이다.
여한구 미 피터슨경제연구소 선임위원·전 통상교섭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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