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인 무당도 유태평양도 다 빨아들이는 예술의 용광로, 윌리엄 켄트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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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방위 예술가 ‘남아공의 피카소’ 윌리엄 켄트리지
‘남아공의 피카소’라 불리는 윌리엄 켄트리지는 지금 세계에서 가장 핫한 예술가다. 최근 뉴욕 하우저앤워스 갤러리에서 8월까지 이어지는 개인전을 오픈했고, 지난달엔 런던 로열페스티벌홀에 공연을 올렸다. 전시와 공연 양쪽 분야의 VIP라는 얘긴데, 국내선 주로 시각예술가로 알려졌다. 10년 전 4개월에 걸친 국립현대미술관 초청전이 반향이 컸다. 아파르트헤이트를 비롯해 폭력의 역사에 관한 기억들을 복원한 작품에 정치적 메시지가 가득했다. 올해는 공연예술가로 서울에 왔다. ‘경계없는 예술’을 표방한 GS아트센터가 ‘예술가들’ 시리즈 1호로 초청한 것. 최근 공연된 오페라 ‘시빌’에 이어 30일 ‘쇼스타코비치 10: 다른 세상을 꿈꿀 수 있었더라면’을 서울시향과 협연한다. 뉴욕 링컨센터, 런던 바비컨센터 등 세계 주요 공연장이 탐내는 그의 무대는 아프리카 부족의 영혼부터 러시아 클래식 거장의 고뇌까지 빨아들이는 용광로와 같다.
![30일 서울시향과 협연할 켄트리지의 콜라주 애니메이션 ‘쇼스타코비치10: 다른 세상을 꿈꿀수 있었더라면’. [사진 GS아트센터]](https://img1.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505/24/joongangsunday/20250524000219580xqit.jpg)
여기까지는 서곡일 뿐. 고대 그리스의 첫 식민지 쿠마에의 무녀 시빌 신화는 2막에 펼쳐진다. 점괘를 적은 나뭇잎들이 바람에 날려 대혼란에 빠지는 이야기는 알고리즘에 흔들리며 살아가는 현대인들에 대한 은유다. 애니메이션 영상을 배경 삼아 흑인 아티스트 9명이 각자의 부족어로 노래하고 연기하고 춤추는데, 조화롭고 아름답다. 관객과의 대화를 이끈 소리꾼 유태평양과의 즉흥 연주 ‘쑥대머리’가 더해져도 제법 근사하다.
![최근 GS아트센터에서 공연된 챔버 오페라 ‘시빌’. [사진 GS아트센터]](https://img2.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505/24/joongangsunday/20250524000221125wfjq.jpg)
넬슨 만델라를 변호한 인권 변호사의 아들로 태어난 켄트리지는 백인 엘리트로서 누린 특권, 세상의 차별과 폭력 사이에서 예술세계를 개척했다. 정치학을 전공하고 미술, 연극학교까지 나와 아파르트헤이트 이후의 사회상을 묘사한 목탄 드로잉 애니메이션으로 처음 주목받았고, 2005년 모차르트 ‘마술피리’로 오페라 연출을 시작했다. 그의 공연은 특정 역사적 사건을 취해 원작의 관점을 뒤집고, 드로잉·설치·퍼포먼스 등 자신의 매체를 모두 결합한 형태로 재창조하는 게 특유의 스타일이다. 공연을 보고 나니 그의 예술세계가 더욱 궁금해져 질문을 던졌다.
![전방위 예술가 윌리엄 켄트리지. [사진 GS아트센터]](https://img1.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505/24/joongangsunday/20250524000222530kngy.jpg)
Q : ‘시빌’을 보며 최근 한국의 무속 스캔들이 떠올랐다.
A : “무속에 의존하는 건 위험하지만 무속이 다루는 운명, 삶, 죽음에 대한 질문은 우리 모두 저항할 수 없는 영역이다. ‘시빌’의 핵심은 답을 알 수 없다는 거다. 미래에 관한 질문을 시빌에게 하면 동굴 입구에 답이 적힌 잎사귀를 남겨두지만, 바람이 불어 잎사귀가 뒤섞여 다른 이의 운명을 받게 된다. 결국 답이 아니라 질문을 품고 가는 이야기다.”
Q : 아티스트가 모두 흑인이고, 각 부족의 언어로 노래했다.
A : “요하네스버그 시민 대다수가 흑인이다. 그들은 다른 사람의 음악을 연주한 게 아니라 직접 음악을 만들고 무용을 창작해 참여했다. 이들이 사용하는 언어도 각자의 모국어이기에 감정과 사운드가 자연스럽게 담겼다. 한국은 상당히 동질적인 사회라 이 구성이 낯설지 몰라도 우리에겐 자연스럽고 일상적이다.”
A : “점심식사 자리에서 그가 남아프리카에 살았단 걸 알고 즉흥을 해보자 했다. 그와 함께 노래한 순간은 모두에게 마법 같은 시간이었다. 전혀 다른 노래가 매우 가깝게 어우러질 수 있다는 걸 새삼 느꼈고, 우리 가수들도 판소리에 관심을 갖게 됐다.”
인사동의 질감 좋은 한지 ‘오늘 최고 발견’
![‘쇼스타코비치10: 다른 세상을 꿈꿀수 있었더라면’ 워크숍. [사진 GS아트센터]](https://img2.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505/24/joongangsunday/20250524000223882fuyb.jpg)
Q : 라이브 공연의 마법이라면.
A : “요즘 우리는 스마트폰에 너무 많은 시간을 쓴다. 옆에 누가 있든 각자 고립된 세계에 존재한다. 라이브 공연의 힘은 공동의 시선과 청취를 만든다는 데 있다. 모두가 함께 바라보고, 함께 듣는 감각은 깊은 감정적 안정감을 준다. 공연 중에도 사람들은 온전히 몰입했다가 현실로 돌아오기를 반복하지만, ‘함께’라는 감각은 관객에게나 공연자에게나 소중한 경험이다.”
Q : 목탄 드로잉 작가 입장에서 최근 생성 AI 이미지를 어떻게 보나.
A : “AI 이미지에는 감정이 결여돼 있다. 감정의 시뮬레이션은 가능하니 감동적인 작품이 나올 수도 있지만, 알고리즘에서 온 것인지 창의적인 요구에 따른 것인지 알 수 없다. 작업자 입장에선 몸을 쓰는 감각이 부족하다. 나는 팔을 뻗어 종이에 선을 긋고, 몸 전체로 생각하고, 배우와 함께 움직일 때 나오는 감각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AI 작업은 그런 느낌을 줄 수 없다.”
A : “나는 종이와 목탄을 사용하는 구식 예술가다. 하지만 형식의 결합이 비범하게 보일 수는 있다. 아방가르드 예술의 역사에서 받은 영향은 내게 매우 중요하다. 세계는 항상 임시적이고 구성된 것이라는 인식이 내 작업의 중심이다.”
![영상 속 배우가 쇼스타코비치 가면을 쓴 모습. [사진 GS아트센터]](https://img3.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505/24/joongangsunday/20250524000225398trli.jpg)
Q : 인권변호사였던 부모가 예술에도 영향을 미쳤나.
A : “남아공의 아파르트헤이트가 얼마나 사악한 체제였는지 이해하게 했고, 세상을 이해하는 매우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사고방식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나는 이성적이고 직설적인 방식이 아니라도 같은 윤리적 방향성에서 세상을 이해하고 싶었고, 예술은 그런 가능성을 열어주는 길이었다.”
Q : 그래도 정치학을 전공했다.
A : “정치학 수업을 들으며 밤에는 미술학교에서 드로잉 수업을 듣고, 연극도 병행했다. 내게 두 세계는 항상 공존했다. 정치학을 통해 배운 가장 큰 교훈은 세상은 사실이 아니라 과정으로 이해돼야 한다는 것이다. 사회의 아이디어가 어떻게 변화하는지 탐구했던 공부가 예술에 큰 영향을 주었다.”
Q : ‘경계없는 예술’의 대명사다.
A : “나도 처음엔 열심히 연기했고, 회화에 집중했다. 나중에야 그것들이 하나로 결합된 방식이 내게 맞는다는 걸 알게 됐다. 다다이즘 이후 예술은 장르의 경계를 허무는 작업이 가능해졌고, 요즘 예술가들은 시·음악·움직임 등을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다. 하지만 단순히 모든 것을 해보라고 권하진 않는다. 각 영역에서 깊이 있는 탐구가 필요하니까.”
Q : 서울에서 예술적 영감도 얻었나.
A : “서울은 엄청난 규모라 내가 본 건 아주 일부에 불과하다. 국립현대미술관과 리움은 여러 번 갔고, 오늘은 인사동의 작은 문방구에서 내가 찾던 매우 부드럽고 질감 좋은 한지를 발견했다. 먹에도 좋지만 목탄 드로잉에도 좋고, 깨끗하게 지워지더라. 오늘 최고의 발견이었다.”
■ 소련 체제 억압 속 예술가의 고뇌 ‘쇼스타코비치 10…’
「 30일 공연되는 ‘쇼스타코비치 10: 다른 세상을 꿈꿀 수 있었더라면’은 2022년 루체른 심포니의 위촉으로 제작된 작품으로, 정치적 예술가로서 그의 정체성이 뚜렷하다. 1953년 스탈린 사망 직후 초연된 교향곡 10번 연주를 클래식계의 편견에 맞서는 흑인 지휘자 로더릭 콕스가 이끌고, 스크린에 레닌·스탈린·트로츠키 등 소련 혁명가들의 인형극이 펼쳐진다.
교향곡 10번이 표제음악은 아니지만, 소련 혁명 40년사를 담은 공연으로 거듭났다. 1악장은 레닌의 죽음, 2악장은 시인 마야콥스키의 비극, 3악장은 트로츠키의 망명과 죽음, 4악장은 스탈린의 종말을 그린다. 희망과 절망을 오가는 긴장감 넘치는 음악과 함께 영상 속 쇼스타코비치가 체제와 예술 사이 줄타기를 한다.
뉴욕타임즈는 “역사적 인물과 상징적 이미지를 조합한 켄트리지의 콜라주 애니메이션은 소련의 유토피아적 열정에 대한 향수와 예술과 정치가 얽히는 복합적 관계를 교묘하게 그려냈다”고 평하며 “정치 이데올로기가 예술가를 집어삼키는 짝사랑 이야기”로 정의했다.
이밖에도 오페라 ‘코’를 연출하는 등 쇼스타코비치 음악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는 그에게 이유를 물었다.
“쇼스타코비치 음악은 늘 시각적인 상상을 불러일으키죠. 그는 무성영화에 피아노를 연주했고, 영화와 연극 음악도 많이 작곡했기에 이미지와 사운드의 공존이 익숙합니다. 감정의 스펙트럼이 넓은 그의 음악은 그저 순수한 음악이 아니라 시대의 산물이라는 점도 흥미로워요. 그의 삶과 작업은 억압적인 체제 속 예술가의 복잡한 역설을 말해줍니다. 레닌·마야콥스키·트로츠키·스탈린이 다 사라졌지만 쇼스타코비치는 지금도 전 세계에서 연주되고 있잖아요.”
」
유주현 기자 yjj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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