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 뉴스타파] <5·18 45주년 특집> 1980년 광주, 죽은 자가 살렸다
12·3 윤석열의 내란으로 혼란에 빠진 대한민국이 우리 사회에 던진 질문이 있다.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을까?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을까?
뉴스타파는 그 질문에 답을 찾아, 국가기록원에서 1988년 국회 광주특위 청문회 영상을 입수했다. 광주를 피로 물들인 전두환의 내란과 그로부터 45년 후에 벌어진 윤석열의 내란은 너무도 닮아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1988년 국회 광주특위 청문회는 광주 항쟁의 진상규명을 위한 첫 국가 차원의 조사였다.
앞서 뉴스타파는 <5·18 45주년 특집>으로 다시 보는 5공 청문회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를 보도했다.
뉴스타파는 국회 광주특위 청문회 속 김대중 전 대통령의 진술에 주목했다. 5·18 광주항쟁의 주모자로 몰려 사형수가 됐음에도 살아돌아온 김대중. 그의 증언은 지금 한국 사회에도 큰 울림을 준다. 1980년 5월 광주가 2025년 한국 사회에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80년 5월 유족에게 악몽을 되살린 12·3 윤석열 내란
45년이 흘렀지만 가족과 이웃, 친구를 잃은 광주항쟁 희생자 가족들의 시간은 여전히 80년 5월에 멈춰 있다. 김길자 씨의 아들 고 문재학 열사는 80년 5월 마지막까지 전남도청을 지키다 계엄군의 총에 맞아 숨졌다. 당시 나이 열일곱살로, 시위에 참여했던 친구의 죽음을 보고 시민군에 합류한 고등학생이었다. 그의 사연은 2024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한강 작가의 <소년이 온다>의 모티브가 된 것으로 알려졌다.
김길자 씨는 지난해 겨울 벌어진 12·3 계엄을 누구보다 고통스럽게 지켜봤다. 45년 전 비상계엄으로 광주를 짓밟은 전두환과 12.3 계엄으로 시민을 짓밟으려 했던 윤석열은 너무도 닮아 있었다. 12.3 계엄이 있던 날 밤, 김길자 씨는 다사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80년 광주의 악몽을 되살려야만 했다.
5·18은 광주에서만 그렇게 저기 했잖아요. 그랬는데 서울 국회에서 그렇게 한 거 보고, 이제 진짜 난리가 날 것 같아요. 진짜 난리 날 것 같았어요. 그래서 그것이 더 화가 나고 그랬어요. 계엄을 선포한 날 저녁에 이제 시민들이 그렇게 많이 나갔잖아요. 나도 멀리 있으니까 그렇지 가깝게 있었으면 나도 갈 용의가 있어요.
- - 김길자 씨 / 故 문재학 열사 어머니
1979년 12·12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전두환 신군부는 80년 5월 17일,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했다. 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된 다음 날인 5월 18일 오전, 광주 전남대 정문 앞에서 시작된 시위는 대규모 항쟁으로 전개됐다. 수많은 광주 시민들이 거리로 뛰쳐나와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당시 시민들은 "비상계엄 해제하라", "전두환은 물러가라", "김대중을 석방하라"는 구호를 외쳤다.
우리 아기(문재학)가 목 쉬어 갖고 집에 들어왔을 때, 왜 그렇게 목이 셌냐고 그렇게 말을 했더니 김대중 씨 석방하고, 전두환이 물러가라고 선배님들이 다 그렇게 해서 그렇게 해서 저도 그랬다는 거예요.
- - 김길자 씨 / 故 문재학 열사 어머니
전두환 신군부는 민주주의 수호 투쟁을 했던 김대중을 정적으로 삼았다. 심지어 내란 음모 혐의를 씌워 그에게 사형까지 선고했다. 5월 17일 비상계엄 선포 직전 체포돼 5월 18일 이후의 상황을 전혀 몰랐던 김대중은, 50여 일이 지난 뒤에야 광주에서 벌어진 참상을 알게 됐다. 그리고, 광주시민들이 자신을 석방하라고 외쳤다는 사실도 처음 알게 됐다. 그는 광주의 희생을 떠올리며 자신에게 내려진 사형 선고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광주의 상황이 없었으면 김대중 전 대통령은 정말로 처형됐을 거예요. 전두환이 마음 놓고 죽였을 겁니다. 그리고 전 세계에서 그렇게 구명을 하기도 쉽지 않았을 거고. 광주에서 처절한 희생이 있었기 때문에 김대중 전 대통령이 살아날 수 있었다고 봐요. 광주 분들이 수많은 피를 흘렸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김대중 전 대통령이 살아날 수 있었던 거죠.
- -설훈 전 국회의원 (김대중 평화민주당 총재 비서)
김대중은 5·18 광주민주화운동 이후 7년 만인 1987년 9월, 광주를 찾았다. 수많은 시민들이 광주역에 모여 그를 반겼다. 목숨 걸고 김대중 석방을 외쳤던 광주시민들과 죽을 고비를 넘겨가며 독재에 맞섰던 김대중은 서로를 붙들고 오열했다.
하느님과 죽지 않고 살아서 7년 만에 망월동의 여러분 앞에 섰습니다. 광주! 무등산! 망월동! 감옥에서, 이국땅에서, 그리고 서울의 하늘 아래서 얼마나 나의 피눈물을 짜내고 가슴을 떨리게 한 이름들이었던가!
- -김대중 전 평화민주당 총재 / 광주 망월동 묘지(1987년 9월 8일)
생중계 청문회에서 김대중은 단호했다... "발포 명령자는 전두환, 삼척동자도 안다"
그후 1988년 4월, 여소야대 국회가 탄생하면서 5.18 광주 항쟁 진상 규명을 위한 청문회가 열렸다. 전국 곳곳의 기차역과 버스터미널 등에서 많은 시민들이 함께 TV를 통해 청문회 생중계를 지켜봤다. 80년 5월 광주항쟁의 배후로 지목돼 사형수가 됐던 당시 평화민주당 총재 김대중이 첫 번째 증인으로 나서 전두환의 만행을 낱낱이 알렸다. 끝끝내 발포 명령을 부인하던 전두환 신군부를 향한 그의 일침이 TV를 통해 전국에 생중계되는 순간이었다.
대한민국에서 상식을 가진 사람 치고 이 광주에서 이 대량 학살과 무력행사가 전두환 씨 몰래, 관여 없이 행해졌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나는 단 1%도 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중략)
당시 보안사령부는 합동수사본부장을 사령관이 겸하고 있어서 거기에다가 중앙정보부장까지 겸하고 사실상 우리나라가 국권을 다 쥐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광주의 505부대라는 보안사령부의 그 지소를 가지고 있어 광주의 모든 군부대나 이 정부 기관을 실질적으로 총지휘하는 그런 기관이었습니다. 적어도 한 열흘을 두고 계속된 발포인데 이 모든 수사기관의 총책임자가 그것을 모르고 있었다, 또 그것에 대해서 아무 판단도 안 내렸다, 이러면 아마 삼척동자도 웃을 것입니다.
(중략)
저는 전두환 씨가 발포의 진실한 책임자라는 것은 해가 아침에 동쪽에서 뜨는 것과 마찬가지로 확실하다고 생각합니다.
- -김대중 전 평화민주당 총재 / 국회 광주특위 청문회(1988년 11월 18일 )
당시 김대중의 증언은, 전두환과 신군부가 시민들을 학살한 폭도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말해주고 있다.
저는 이 5·18 광주항쟁은 민족 역사의 동학혁명 못지않게 참으로 위대한 우리 민중들의, 국민들의 그 항쟁으로서 남을 걸로 확신합니다. 광주 민중항쟁은 천하를 바꿔도 바꿀 수 없는 귀중한 인명을 권력이 함부로 살상한 반인간적인 행동이기 때문에 그 진상이 철저히 밝혀지고 다시는 이런 일 없는 조치가 취해져야 그 한이 풀릴 수 있습니다.
(중략)
광주의 문제는 우리나라 민주주의로 가는그 맥을 절단한 반민주적인 쿠데타이기 때문에 이것에 대한 철저한 청산 척결이 있어가지고 민주화의 길로 나가야 정통성이 다시 이어진다고 생각을 합니다.
- -김대중 전 평화민주당 총재 / 국회 광주특위 청문회(1988년 11월 18일 )
저는 이 5·18 광주항쟁은 민족 역사의 동학혁명 못지않게 참으로 위대한 우리 민중들의, 국민들의 그 항쟁으로서 남을 걸로 확신합니다. 광주 민중항쟁은 천하를 바꿔도 바꿀 수 없는 귀중한 인명을 권력이 함부로 살상한 반인간적인 행동이기 때문에 그 진상이 철저히 밝혀지고 다시는 이런 일 없는 조치가 취해져야 그 한이 풀릴 수 있습니다.
(중략)
광주의 문제는 우리나라 민주주의로 가는 그 맥을 절단한 반민주적인 쿠데타이기 때문에 이것에 대한 철저한 청산 척결이 있어가지고 민주화의 길로 나가야 정통성이 다시 이어진다고 생각을 합니다.
- -김대중 전 평화민주당 총재 / 국회 광주특위 청문회(1988년 11월 18일 )
대선 앞두고 후보들 광주행... 국힘 김문수는 윤석열의 내란에 대해 사과하지 않았다
지난 17일, 김문수 국민의힘 대선 후보는 내란 옹호했던 국힘 인사들과 함께 국립 5·18민주 묘지를 찾았다. 현장에 모인 광주 시민들이 "내란 세력은 광주를 떠나라"고 외치기도 했다. 이날 현장에는 국민의힘 김기현, 박대출, 김용태 의원 등도 찾았다. 그러나 이들은 끝내 80년 5월(의 악몽)을 떠올리게 한 윤석열의 내란에 대해 사과하지 않았다. 그들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5.18 희생자들 앞에 고개 숙여 묵념했다. 뉴스타파 취재진은 "5·18 열사들 앞에서 내란에 대해 사과해야 진정성 있는 사과가 아니겠냐"고 물었지만 김문수 후보는 아무런 답도 하지 않은 채 서둘러 자리를 떴다.
내란에 동조한 것에 대한 사과를 먼저 해야죠. 아니면 자당의 내란에 대해서 잘못했다고 정식으로 지도부가 사과를 하고 광주에 와야 된다고 생각해요. 그게 기초다. 그렇지 않으면 5·18을, 그 숭고한 희생을 이용하는 거예요. 사과하고 반성하고, 내란을 일으켜서는 안 되겠다, 민주주의를 기초로 정치를 하겠다, 이걸 선언하고 (광주에) 오면 좋겠어요.
- - 박구용 교수 / 전남대 5·18연구소 부소장
우리 사회는 여전히 5·18을 왜곡하는 사람들이 정부 곳곳에 포진해 있다. 그들은 여전히 건재하며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역사를 부정하고 있다. 박선영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위원장이 대표적이다. 지난달 24일 국회에서 박선영 진화위 위원장은 북한군 개입설에 대해 "논란이 있다", "그 내용에 대해서는 모른다"는 궤변을 당당하게 늘어놓으며, 엉터리 역사 인식을 드러냈다.
신정훈 국회 행정안전위원장 : 북한군의 개입설에 대한 진화위원장의 인식은 어떻습니까?
박선영 위원장 : 그 질문이라면 논란은 있지만 저는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제가 모른다고요. 그런 논란이 있는 것은 알지만 그 내용에 대해서는 모른다고요.
- -국회 행정안전위원회(2025. 4. 24)
민주주의 고비 때마다 우리의 과거는 현재를 도왔다. 80년 광주는 87년 민주항쟁을, 그리고 세월이 흘러 2024년에는 내란의 위기로부터 대한민국을 구했다. 그 중심에는 언제나 민주주의를 갈망하는 시민들의 힘이 있었다.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언제나 시민들이 지켜왔다. 1980년 광주의 희생을 거름 삼아 싹을 틔우고 성장해온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그래서 반드시 지켜야만 하는 우리의 자랑스런 유산이다. 이제 살아남은 우리가, 우리의 미래를 구하기 위해 노력할 차례다.
한편, 뉴스타파는 1988년 11월 18일 국회에서 열린 김대중의 광주특위 청문회 당시 발언들을 있는 그대로 공개한다. 자세한 내용은 김대중 증언록 특별페이지(https://pages.newstapa.org/2025/dj_518hearing)에서 확인할 수 있다.
뉴스타파 뉴스타파 다큐팀 docu@newstap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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