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들이 만든 운동장은 뭔가 특별한 게 있다 [사람IN]
축구공이 잔디 위를 튕기며 불규칙한 리듬을 만든다. 분명 실수였지만 웃음이 터진다. 공을 놓친 아이가 말한다. “공 다시 주세요!” 항상 골키퍼 옆에 서 있기만 하던 여자아이였다. 못하니까 자신이 없고 자신이 없으니 재미가 없었다. 그러던 아이가 앞으로 한 걸음씩 나오기 시작했다. 공을 발에 맞춰보고 그다음에는 패스를, 슛을 해본 뒤였다. 경기 종료 휘슬을 불자 아이가 쪼르르 달려와 말한다. “선생님, 저 못하지만 재밌어요.” 골을 넣고 달려온 것보다 더 반가운 말이었다.
신혜미 위밋업스포츠 대표(47)는 축구선수였다. 결혼과 출산을 거치면서 경력이라 불리던 시간이 흩어졌다. 돌아보니 운동 이외의 삶에 대해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다. 스스로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렇게 만들어진 스포츠 선수 경력은 오히려 사회로 돌아가는 데 진입장벽이 됐다. 이력서 한 줄 쓰는 것도, 그 이력서라는 서류를 어디서 찾아서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도 몰랐다.
경력 단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여러 교육을 들으러 다닐 때였다. “왜 여성 스포츠인들이 아무것도 안 하는지 모르겠다.” 강사가 지나가듯 말했다. 정말 그랬다. 양궁·배구·유도·스케이트 등 다양한 종목에서 세계적으로 뛰어난 여성 선수들은 항상 나타났지만 은퇴 이후 활동을 이어가는 선수는 많지 않았다. ‘그러게, 왜 우리는 아무것도 안 하고 있지?’라고 생각했다. 동시에 왜 그런지도 알 것 같았다. 신 대표의 마음이 꿈틀거렸다.
2018년 사회적 기업 위밋업스포츠가 이렇게 만들어졌다. 신혜미 대표처럼 은퇴 후 갈 길을 찾지 못하는 여성 스포츠 선수들에게 다시 운동장을 열어주는 것이 목표였다. 40대 이상 여성만 참가할 수 있는 ‘언니들의 리그’를 먼저 시작했다. 6개 참가팀으로 시작한 축구대회는 이제 매년 5월 말 전국에서 16개 팀이 모일 정도로 몸집이 커졌다. 골잡이 70대 언니도, 늘 시댁과 친정·자녀를 위해 사용했던 연차를 처음으로 온전히 자신만을 위해 써본 50대 언니도 대회가 열리면 한자리에 모여 공을 찬다.
언니들이 모여 성장한 위밋업스포츠는 축구·농구·주짓수 등 다양한 스포츠의 정규수업, 원데이 클래스, 팀 리그, 지도자 양성까지 단계별 프로그램을 촘촘히 이어가고 있다. 최근 가장 많은 시간과 노력을 쏟는 건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교육과 지도자 양성이다. 신혜미 대표는 이렇게 말했다. “요즘 아이들이 지는 걸 못해요. 상처를 크게 받고 회복이 안 되니까. 학부모들의 문제 제기도 많으니 학교에서도 경쟁을 피해요. 그런데 지는 걸 배우지 못하면 이기는 법도 모르잖아요. 건강한 경쟁을 제일 잘 배울 수 있는 게 스포츠라고 생각해요. ‘못해도 괜찮아. 져도 괜찮아. 우리 팀이 다 같이 하면 되니까 두려워하지 마’라고 알려줘요. 이 교육 철학을 지도자 양성 프로그램에 그대로 적용해요.”
신혜미 대표의 시선은 최근 다른 곳에 닿고 있다. 위밋업스포츠와 함께하며 궁리해온 일은 단순히 ‘여성’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장애인·이주민·저소득층, 그리고 여러 이유로 운동장에서 소외되는 아이들까지 스포츠 경험의 기회를 갖지 못한 사람들은 더 많았다. 눈높이를 달리하니 점점 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다고 신 대표는 말한다. 그가 만든 운동장이 점점 더 넓어지고 있다.
문상현 기자 moon@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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