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는 땅 위에서, 그렇게 우리는 헤어졌다 [비장의 무비]

김세윤 2025. 5. 23. 07:29
음성재생 설정 이동 통신망에서 음성 재생 시 데이터 요금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글자 수 10,000자 초과 시 일부만 음성으로 제공합니다.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해피엔드〉
감독: 네오 소라
출연: 구리하라 하야토, 히다카 유키토

네 번의 지진에서 이 영화가 시작되었다. 나의 세계가 한꺼번에 흔들리고 무너지는 경험이 없었다면 만들지 못했을 이야기다. 10년 가까운 세월 동안 다시 쓰고 고쳐 쓰며 공들여 완성한 장편 데뷔작 〈해피엔드〉를 이해하려면 그래서, 감독 네오 소라의 청춘을 뒤흔든 재난의 기억부터 살펴야 한다.

첫 번째 지진은 2011년 3월 11일. 당시 미국에서 대학을 다니던 그는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를 계기로 정치에 눈을 떴다. 같은 해 미국에선 월가 점령 시위가 시작되고 얼마 뒤 “흑인의 목숨은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 운동이 들불처럼 번져가는데, 일본이라는 나라는 엄청난 재앙을 겪은 뒤에도 바뀌는 게 없었다. 실망하고 분노했다.

2014년 일본을 방문했을 땐 거리 곳곳에서 혐한 시위를 목격했다. 외국인을 향한 증오가 넘쳐났다. 1923년 관동대지진을 더 깊이 공부하는 계기가 되었다. “우물에 독을 탔다는 거짓 소문을 퍼뜨려 6000명 넘는 한국인이 살해당”하고 “중국인, 장애인, 도쿄 사투리를 할 줄 모르는 일본인까지” 죽음으로 내몬 그 광기가 언제 다시 일본을 집어삼킬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그래서 아직 일어나지 않은 세 번째 지진을 상상했다. 모두 걱정하는 도쿄 지역 대지진이 현실로 다가온다면, 위기의 순간마다 공포를 조장하고 배제와 차별을 부추기는 정치의 패턴이 달라지지 않는다면, “조선인 학살 같은 과거의 일이 미래에도 일어날 수 있다”라는 경고의 의미를 담아 시대 배경을 가까운 미래로 설정했다.

주인공은 유타(구리하라 하야토)와 코우(히다카 유키토). 같은 학교에 다니며 함께 사고 치는 단짝 친구. 코우는 재일 한국인이고 함께 어울리는 친구 무리 중에는 타이완 혼혈인과 흑인 혼혈인도 있다. 거리에서 마주친 경찰이 수시로 외국인등록증을 요구하며 편을 가르고, 교장은 곳곳에 CCTV를 설치해 전교생을 감시하기 시작한다. “어차피 죽을 거면 즐기다 죽자”라며 밤마다 더욱 디제잉에 몰두하는 유타와 달리, “그렇게 웃고 즐기는 사이에 다 죽는다”라고 말하는 코우는 거리 시위를 이끄는 그룹과 가까워진다. 둘 사이에 균열이 생긴다. 삐걱댄다. 흔들린다. 멀어진다.

“저에게 신념이 생기면서 어떤 친구들과는 단절되었습니다. 제겐 우정이 너무나 소중했기에 정치적 견해가 달라서 친구를 잃는다는 게 정말 슬펐습니다. 마치 발밑의 땅이 무너지는 느낌이었습니다. 제가 포착하고 싶었던 게 바로 그것입니다. 한편으로는 고등학교 친구들에 대한 사랑과 향수를, 다른 한편으로는 연인과 헤어지는 것보다 더 끔찍할 수 있는 친구 사이 이별의 아픔을 담아내고 싶었습니다(네오 소라 감독).”

그렇게 영화에 담긴 네 번째 지진. 감독 본인의 가장 사적인 흔들림과 내밀한 무너짐의 기억. 좋아했던 에드워드 양 영화의 질감으로, 즐겨 듣던 앰비언트와 테크노 장르의 감각으로, 아름다운 데뷔작 〈해피엔드〉를 완성했다. 날카로운 현실 비판의 서브 우퍼로 매력적인 청춘영화를 플레이한다.

지금도 자꾸 생각나는 한 장면. 미러볼 아래 나란히 서서 말없이 마주 보는 유타와 코우. 영화가 끝난 뒤에도 나는 자꾸 그 장면으로 돌아간다. 그 지극한 멜로드라마의 순간이 벌써부터 그리워진다.

김세윤 (영화 칼럼니스트) editor@sisain.co.kr

▶읽기근육을 키우는 가장 좋은 습관 [시사IN 구독]
▶좋은 뉴스는 독자가 만듭니다 [시사IN 후원]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Copyright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