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만 흐르던 100년 전통 뉴욕 도서관이 거대한 공연장으로 변했다

뉴욕/윤주헌 특파원 2025. 5. 23. 0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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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최대 뉴욕 공립 도서관에서 처음 열린 무성(無聲) 공연
소장품 5400점을 바탕으로 한 소품극에 관객들도 눈물
16일 미국 최대 도서관인 뉴욕 공립 도서관 1층에서 무용수들이 공연을 시작했다. 이들이 맞춰 추는 음악은 일반 도서관 방문자들에게는 들리지 않는다./Jonathan Blanc/The New York Public Library

“마음의 준비가 되셨으면 이제 볼륨을 높이고 모니카를 따라오세요. 여러분이 경험해보지 못한 세계로 이끌어 갈 것입니다.”

지난 16일 미국 최대 도서관 중 하나인 뉴욕 공공 도서관(NYPL) 1층 방문자 센터, 초록색 불빛이 반짝이는 헤드폰을 쓰자 귀에서 한 남성의 목소리가 나왔다. 1960년대 도서관 직원처럼 흰색 블라우스와 회색 바지를 입은 모니카를 따라 로비로 나가보니 여섯 명의 무용수들이 같은 복장으로 서 있었다. 헤드폰에서 음악이 흐르고 무용수들이 양팔을 벌려 큰 동작으로 춤을 추기 시작하자 영문을 모르는 도서관 방문객들은 멈춰 서서 카메라로 찍기 시작했다. 무용수들을 보며 음악을 함께 들을 수 있는 사람은 사전에 신청해 헤드폰을 착용한 15명뿐이었다. 그렇게 1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이 도서관에서 무성(無聲) 공연이 시작됐다.

NYPL은 이 공연을 위해 ‘모니카 빌 반스 앤드 컴퍼니’라는 공연 단체와 협업을 했다. 이 단체는 ‘춤이 어울리지 않는 장소에 춤을 가져가는 것’을 목표로 한다. NYPL은 침묵의 장소, 연구의 장소, 독서의 장소로만 인식되는 도서관의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1년간 이 행사를 준비했다. 이 이벤트는 5~17일에만 열렸는데, 한 공연당 15명만 참여할 수 있기 때문에 티켓이 바로 매진됐다.

'LUNCH DANCES'에 참여한 관객들은 헤드폰을 착용하고 무용수 '모니카'를 따라 도서관 구석구석을 다닌다./Jonathan Blanc/The New York Public Library

모니카는 관객들을 도서관의 다섯 곳으로 이끌며 각각의 장소에서 소품극을 선보였다. 1층 지도를 모아 놓은 ‘지도실’에 가니 한쪽에는 하반신 마비를 겪는 ‘넬’이라는 가상의 도서관 단골손님이 앉아 있었다. 그는 1961년 뉴욕 그리니치 빌리지의 지도를 보며 ‘걷다가 넘어져도 나는 어디든지 걸어 다닐 수 있다’는 상상을 하며 그동안 질병으로 자신을 얽어맸던 무기력함과 우울함을 넘어 자유를 느끼게 된다. 이 공연이 펼쳐지는 동안 헤드폰에서는 미국 컨트리 팝 가수 글렌 캠벨의 ‘라인스톤 카우보이가’가 배경 음악으로 흐르며 무용수들은 그녀를 둘러싸고 깡충깡충 뛰며 큰 움직임을 보였다.

공연의 하이라이트는 3층에 있는 길이 약 91m의 열람실 ‘더 로즈 메인 리딩 룸’에서 펼쳐졌다. 이 장소는 NYPL의 상징적인 곳으로 뉴욕을 찾는 관광객들의 필수 여행 코스 중 하나인데, 열람실인 만큼 평소엔 숨소리만 들린다. 이곳에서는 공연 내내 관객들을 따라다니며 ‘주변인’처럼 서 있었던 ‘존’이라는 남성이 걸어 나와 관객 모두의 헤드폰을 벗게 했다. 그리고 뮤지컬 ‘퍼니 걸’의 ‘피플’을 큰 소리로 부르기 시작하며 적막을 깼고, 그때까지 출연한 배우들이 도서관 구석구석에서 나오면서 노래에 맞춰 춤을 췄다. 열람실에 있던 사람들은 처음엔 놀랐지만 의자에서 몸을 돌려 이 장면을 함께 즐기고 박수를 쳤다.

뉴욕 공립 도서관 공연 'LUNCH DANCES'에서는 도서관 1층부터 3층까지 옮겨다니면서 공연이 펼쳐 진다./Paula Lobo/The New York Public Library

이 공연의 연출과 내레이션을 맡은 로비 샌츠 드 비테리씨는 공연이 끝난 뒤 본지와 만나 “5400만점이 넘는 소장품에서 보석 같은 이야기를 끄집어내는 작업이 가장 어려웠다”고 했다. NYPL은 공연을 이 단체에 맡기면서 “도서관과 관련된 이야기를 소재로 공연을 만들어달라”고 했다. 이 때문에 도서관 곳곳에 있는 책, 지도, 사진 등에서 공연에 쓸 소재를 찾는데 그 양이 방대했다는 것이다. 그는 20세기 중반 뉴욕파 시인의 핵심 인물로 불린 프랭크 오하라의 작품을 공연 대본의 바탕으로 삼았다고 했다. 비테리는 “사람들은 ‘도서관은 조용해야 한다’는 인식 때문에 스스로의 감정을 억누르고 있지만 예상치 못한 장소에서 예상치 않았던 방식으로 사람들에게 자유를 선사하려고 했다”고 말했다.

뉴욕 공립 도서관 공연 'LUNCH DANCES' 마지막 파트. 3층에 있는 '더 로즈 메인 리딩 룸'에 관객들이 모인다. 이후 헤드폰을 벗으라는 요청을 받고 곧 이어 공연을 이어진다./Paula Lobo/The New York Public Library

1시간 동안 진행된 공연에 관객들은 흠뻑 빠져들었다. 간간이 웃음을 터뜨리기도 했지만 성별(性別) 불문하고 눈물을 훔친 관객이 여럿 보였다. 공연을 지켜본 기자의 경우, 평소 조용했던 도서관이 헤드폰에서 나오는 음악으로 꽉 채워지며 무용수들이 큰 움직임을 시작한 첫 장면에서 소름이 돋았다. 뉴욕에서 나고 자랐다는 패니 피시바인씨는 “역사적인 장소인 이곳에서 마음을 울리는 공연을 볼 수 있다는 것 자체에 전율을 느꼈다”고 했다. 입소문이 나자 NYPL에는 추가로 공연을 해달라는 요청이 쇄도하고 있다고 한다. NYPL은 “도서관 구석구석을 관객들이 느낄 수 있는 공연이라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면서 “공연을 추가로 할지 검토해보겠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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