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평등의 새장’에서 벗어날 다양한 탈출구 [.txt]
구속력 강한 공동체에 AI·저출산·이민 겹쳐
다문화 시대 걸맞은 ‘동아시아 소셜 케이지’ 필요

초등학교, 아니 국민학교 시절 ‘가정환경 조사서’라는 걸 학기 초마다 제출했다. 부모님의 학력 수준을 물었고, 집이 자가인지 전세인지도 써야 했다. 냉장고나 전축, 피아노 등이 있으면 동그라미를 쳐야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누군가에게는 잔인한 조사였고, 어떤 이들은 자랑스러웠을지도 모르겠다. 찢어지게 가난하지는 않았어도, 생각해 보면 늘 어려웠던 시절임에도 부모님은 ‘중산층’에 한 표를 던지셨다.
시간은 흘러 중산층이라는 말은 거의 사라졌고, 그 자리에 양극화, 불평등 같은 말들이 똬리를 틀었다. 한국 사회 불평등 구조를 연구하는 사회학자 이철승 서강대 교수는 ‘오픈 엑시트’에서 인공지능과 저출생·고령화, 그리고 이민이 만들어낸 새로운 불평등 구조를 제시하면서, 다양한 엑시트 옵션(exit option), 즉 다양한 탈출구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단지 경제적 불평등이라는 다소 추상적인 개념을 넘어 구체적인 정황을 통해 한국 사회의 폐쇄성과 그 극복 방안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지은이에 따르면 한국 사회는 ‘엑시트 옵션’이 원활하게 작동하지 않는다. 소셜 케이지(social cage), 즉 “한 인간이 특정한회 사적 관계나 집단, 조직을 탈출하고자 할 때, 이를 좌절시키거나 단념시키는 심리적-제도적-환경적 장벽”이 강고하기 때문이다. 특히 마을을 중심으로 형성되고 전승된 공동 노동조직과 이를 사회문화적으로 떠받치는 커뮤니티 구조 탓에 동아시아의 소셜 케이지 내부에는 “강력한 내부 규율과 상호 감시 기제가 작동”한다. 가족과 마을, 일터가 하나였던 탓에 탈출할 수 없는 구조였다.

여기에 인공지능, 저출생·고령화, 이민이라는 파고가 겹쳤고, 우리 사회는 “머리끄덩이를 움켜쥐고 오도 가도 못하게 서로의 발목을 잡으며 밀어내기 싸움”의 늪으로 빠져들었다. 결국 오늘의 상황에 맞게 ‘케이지’를 키우는 일과 ‘엑시트 옵션’을 더 다양하게 갖추는 일은 급선무다. 그중 하나가 노동시장의 평가 시스템이다. 우리 노동시장에는 ‘일 잘한다’는 말만 있을 뿐, 어떻게 잘하는지, 왜 잘하는지에 대한 지표가 없다. 학벌만으로 사람을 뽑을 수밖에 없는 이유다. “노동시장에서 생존이 점점 어려워질수록, 한국인들은 학벌에 목을 매게 되어 있다. 믿을 구석이 그것밖에 없는 탓이다. 노동시장에서 생존하려면, 학벌이라도 들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헬조선’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인공지능의 파장은 크고 넓고 깊다. 그 자체로 순기능이 없지 않겠지만, 대개는 일자리의 문제 혹은 인공지능이 야기할 디스토피아에 집중된다. 하지만 지은이는 벼농사 체제의 정주민들이 낯선 자본주의를 비교적 순조롭게 수용했듯이 인공지능 기반 협업 시스템에도 적응하리라 예상한다. 물론 “인공지능을 통해 대체하고 없앨 수 있는 모든 것을 없앤 후, 그에 의해 대체되지 않고 남는 부분에 집중하는 협업”이 되겠지만, 인공지능이 할 수 없는 일을 찾아낼 수만 있다면 그 협업은 성공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동아시아 협업 조직은 인공지능 시대를 감내하고, 흡수하고, 스스로를 변형시켜 재구조화함으로써 결국 살아남을 것이다.” 이 협업 조직에서는 “기계를 쓸 줄 모르는 인간과 인간의 협력 조직에 적응할 줄 모르는 기계 모두 도태”될 수밖에 없다.
저출생 문제는 단지 생산인구와 소비인구 감소에 그치지 않는다. 이는 국가가 없어질지도 모른다는 일종의 위기의식과 잇닿아 있다. 지은이에 따르면 여성에게 결혼과 출산으로 대표되는 가부장제에서 벗어나는 ‘엑시트 옵션’ 중 하나가 일자리다. 경쟁은 심화되었고, 정글은 깊어졌다. 여성이, 남편 없이 혼자 살더라도, 가족 가부장제(아버지)에 의지하지 않으려면 일자리는 필수다. 지은이의 뼈 때리는 문장은 이렇다. “오늘날 청년 여성에게 직장은 필수재이고 가족은 사치재다.”
출산율 회복이 국가적 과제라면 마땅히 “여성들이 출산과 커리어 추구를 더 이상 제로섬 게임으로 인식하지 않게” 하는 정책과 사회적 인식 확대가 절실하다. 인공지능과의 협업을 통해 ‘케이지’를 업데이트하고, 저출생 극복을 위한 인식 개선을 통해 ‘케이지’를 재생산했다면, 마지막 남은 과제는 “케이지 열기”, 곧 이민의 전폭적 수용이 필요하다. 한때 한국은 “노동은 풍부한데 자본이 부족해 일자리가 없는 곳”이었고, 하여 “필요노동이 점점 부족해지는 나라”인 미국 등으로 이민을 갔다. 같은 이유로 이제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에서 한국으로 일자리를 찾아 이동하고 있다.

이주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정주 마을에서 엑시트한” 사람들이다. 고국의 임금에 비해 몇 배 큰 임금은 “어둠을 뚫는 가느다란 빛”과도 같기 때문이다. 미국의 이주자들은 도시의 인구 구성과 정치 지형마저 바꾸었다. 트럼프는 그걸 되돌린다면서 별별 쇼를 다 벌이고 있지만, 이는 혐오와 배제를 낳을 뿐이다. 이주 노동력에 대한 수요가 커진 지금 우리 사회에서 필요한 것은 “이주자들이 주류 사회에 더 깊이, 골고루 섞여” 살 수 있도록 이민의 벽을 낮추고 인식은 높이는 일이다. 그래야 “트럼프와 같은 극우 정치인들”이 활개 치지 못한다. 지은이는 때론 경쟁하고, 필요할 때 협업하면서 “이민·다문화 사회 시대의 동아시아 소셜 케이지”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지은이는 에필로그에서 “민주주의를 지키고 회복하는 과제”만큼 중요한 것이 없다고 일갈한다. 이어지는 말 속에 오늘 위기에 처한 우리 현실을 회복할 실마리가 있다. “사실은, 회복된 민주주의 체제의 대리인들은 자신들의 진영의 이익을 위해 아스팔트 위를 메뚜기처럼 뛰어다니기보다, 이러한 일자리와 스킬의 문제를 어떻게 정책으로 뒷받침할지에 대해 논의할 것이다. 그리고 현명한 대중은, 그러한 리더를 선택할 것이다.”
불평등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케이지’를 넓히고, ‘엑시트 옵션’을 더 충분하게 늘릴 수만 있다면, 해소를 위한 어떤 실마리가 보일 수도 있다. ‘오픈 엑시트’는 그 작은 길잡이로 유용해 보인다.
장동석 출판도시문화재단 사무처장, 출판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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