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은 사진 아닌 그림 …의도와 감정이 재구성 [.txt]

기억이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답하는 한 방법은 기억이란 무엇이 아닌지 보는 것이다. ‘기억한다는 착각’은 25년간 기억 연구에 매진해 온 신경과학자 겸 임상심리학자가 “기억이란 무엇인가”를 전반적으로 알려주는 책인데, 그것을 읽고 난 감상이 “기억이란 이런 게 아니구나”로 요약되는 건 왜일까? 아마도 내가 기억 능력을 일차적으로 경험하기 때문에, 그래서 그 정체를 얼추 안다고 착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직접 경험하는 현상이라고 해서 그것을 반드시 더 잘 아는 건 아니다. 오히려 잘못 알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책에 따르면 우선, 기억은 사진이 아니다. 그림에 더 가깝다. 그림에는 “완전한 사실이라기보다 화가의 시각이 반영된 해석과 추측이 어느 정도 섞여” 있다. 기억도 마찬가지여서, 우리는 무엇을 기억하는 과정에서 이미 정보를 취사선택하고 감정을 덧붙인 형태로 저장한다. 똑같은 일을 경험했더라도 사람에 따라 기억이 다른 것은 이 때문이다.

기억은 또 한번 새겨지면 영원히 그대로 보존되는 석판이 아니다. 쓰인 것 위에 수정이 가해지고 계속 덧쓰인 양피지에 더 가깝다. 이것은 기억 인출, 즉 기억을 다시 떠올리는 과정 자체가 그 기억을 변형시키기 때문이다. 우리가 현재 시점에 품은 의도와 감정이 불러낸 기억에 색채를 덧입혀서 살짝 다른 형태로 재저장하는 것이다. 기억을 자주 인출할수록 그 기억을 품은 세포 연합이 강화되어 더 잘 기억하게 되겠지만 동시에 인출할 때마다 변형이 가해져서 원본과는 달라질 위험도 커진다니, 아이러니하다. 아니, 어쩌면 아이러니가 아닌가? 왜냐하면 심리학자 프레더릭 바틀릿의 말마따나 “곧이곧대로 기억하는 것은 놀라울 정도로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기억의 메커니즘은 우리가 과거에 만난 어떤 남자의 이름을 기억하는 데 도움이 되도록 만들어지지 않았다.” 생물체에게 필요한 것은 더는 필요하지 않은 기억을 망각하는 시스템, 새로운 정보가 입수되면 그에 대응하여 굳은 기억을 수정하는 시스템이다.
여기서 세번째 부정문이 따라 나온다. 기억은 과거의 문제가 아니다. 현재와 미래의 문제다. 기억은 한번 습득한 정보를 잘 간직했다가 그것을 바탕으로 현재에 더 빠르게 환경을 파악하고 미래에 더 나은 선택을 하기 위한 기술이지, 무료할 때 옛 추억에 잠기라고 주어진 기능이 아니다. 인간의 기억이 일화기억과 의미기억의 이중 구조로 구축된 점, 맥락이 제거된 도식이 따로 저장되는 점 등은 이 대전제하에서 합리적이다. 저자는 19세기에 무의미한 세 글자 단어 수천개를 직접 외워서 연구했던 가련한 선구자부터 바다사자의 뇌를 자기공명영상으로 촬영한 연구마저 있는 현재까지 백여년의 과학적 기억 연구가 다다른 결론이 이것이라고 주장하며, “인간의 뇌는 암기 기계가 아니라 생각하는 기계다”라고 말한다.
이 밖에도 인지행동치료, 가짜 기억, 외상후스트레스장애, 집단기억, 건망증 등 구체적 상황에 대한 설명도 담겨 있다. 덕분에 나도 궁금증을 하나 해소했다. 나는 전자책과 종이책을 두루 보지만 종이책으로 읽은 것을 더 잘 기억한다고 느끼는데, 그냥 편견일까? 이 책에 따르면 기억 인출에서 결정적인 요소는 맥락, 즉 어떤 기억이 형성되었을 때의 장소와 분위기에 대한 감각이다. 종이책은 책장을 넘길 때마다 달라지는 무게감, 촉감, 색과 활자의 시각 등 감각적 요소를 아직까지는 전자책보다 더 풍성하게 제공한다. 그것이 그 속의 내용을 기억하는 데 도움이 될 게 분명하다.

김명남 과학책 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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