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보영의 정상에서 쓴 편지] 25. 명봉산:하루를 마무리하는 시간
원주 문막읍 서쪽 위치 해발 599m 명봉산
‘봉황새 울음소리 들을 수 있는 산’ 이야기 전해져
일과 마치고 부담없이 올라 찬란한 일몰 만끽
500m 오르면 진달래길·명봉산 갈림길 나와
8부 능선 잇는 진달래길 갈림길서 정상까지 4㎞

오랜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문막읍에 내려와 산 지도 3년을 채워갑니다. 원주의 유일한 읍인 문막읍으로 결혼과 동시에 이주했는데, 처음에는 이미 적응된 생활의 거처를 옮겨 낯선 타지로 떠나는 것이 걱정되기도 했고 20대 때부터 나름 단단하게 쌓아온 시간의 탑이 무너지는 것은 아닐까 싶어 터전을 옮기는 것이 망설여지기도 했으나 그러한 고민이 무색하게 저는 지금의 일상을 꽤 만족스럽게 영위해가는 중입니다. 삶은 저 스스로 굴러가고, 그렇게 역주하는 삶이 가져다주는 하루하루는 마치 하늘의 선물과 같네요.
자주 가는 식당도, 카페도, 마트도, 미용실도, 은행도, 병원도, 약국도 대체로 하나인 까닭에 이곳에서는 무언가를 일일이 재고 따지지 않아도 됩니다. 자본주의 사회가 인간에게 제공하는 기쁨 중 하나가 선택의 자유일 텐데 여기서는 그러한 자유가 크게 필요하지 않지요. 선택지가 하나인 삶의 좋은 점은 시간을 아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가고자 하는 목적지까지의 경로를 때마다 재설정할 필요도 없고 어느 길이 더 가까운 길인지 비교하지 않아도 됩니다. 원하는 곳으로 직진하는 인생은 단순합니다.

이러한 단순한 인생의 구심점에는 바야흐로 ‘뒷산’이 있습니다. 3년 전, 서울에서 살던 집을 떠나기가 못내 아쉬웠던 것도 사실은 뒷산 때문이었고요. 누군가가 이 세상 수많은 산 중 가장 좋은 산을 물으면 저는 주저 없이 뒷산을 말합니다. 아무리 명산이어도 자주 갈 수 없으면 그저 달력 속 그림 같은 사진에 지나지 않으니까요. 오르는 만큼 다가오는 곳이 산이니까요. 그렇기에 하루 중 언제라도 부담 없이 오를 수 있는 뒷산은 전 세계 그 어떤 멋진 산과도 비교할 수 없는 최고의 명산입니다.
지금 사는 집의 뒷산은 해발 599m의 명봉산입니다. 한자로 ‘울 명(鳴)’ 자와 ‘봉황새 봉(鳳)’ 자를 쓰는데 ‘봉황새의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산’이라는 비범한 이야기가 전해지지요. 저의 하루는 매일 아침 창문을 활짝 열고 명봉산을 감상하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대수롭지 않은 루틴이지만 그렇게 차곡차곡 쌓은 일상이 오늘에 이르렀고요. 명봉산의 색채가 미묘하게 바뀌는 것을 바라보며 둔감히 잊고 지내던 계절의 변화를 새삼 알아차린 적도 많습니다.

뒷산이기에 하루 중 언제라도 부담 없이 오를 수 있는 명봉산을 저는 대체로 해가 질 무렵에 오르곤 합니다. 보통 그날의 일과를 마치고 귀가했을 때의 시간대라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이고, 문막읍이 지도상 원주의 서쪽에 있기에 이 무렵이면 산 위에서 찬란한 일몰 풍광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명봉산 능선에 서서 우거진 나무 사이로 떨어지는 태양을 바라보는 순간이면 그날 하루의 수고와 피로는 기꺼이 감내할 만큼 사소해집니다. 분노와 미움과 같은 불쾌한 감정도 작열하는 태양 빛에 녹아 말끔히 사라져버립니다.
명봉산 산행 들머리는 동화마을수목원입니다. 원주에 설립된 최초의 공립수목원이자 우리나라에서 무려 아홉 번째로 큰 수목원답게 다양한 수종의 나무와 식물을 볼 수 있습니다. 집 근처에 이러한 명소가 있다는 것은 커다란 행운입니다. 일부러 수목원에 가려고 날을 맞추지 않아도 명봉산에 가는 날이면 자연스럽게 수목원 산책을 합니다. 수목원 인근의 동화사 역시 이 마을의 명물입니다. 여느 사찰처럼 규모 있지 않아도 불심을 들여다보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평온합니다.

언제 찾아와도 고즈넉한 분위기의 동화사 경내를 한 바퀴 둘러본 뒤 서둘러 명봉산에 들어섭니다. 초행인 사람은 산행 이정표를 따를 테지만 이 산이 뒷산인 저로서는 이제 눈 감고도 길을 압니다. 500m 정도 된비알을 치고 오르면 진달래길과 명봉산 갈림길에 이릅니다. 진달래길은 명봉산의 8부 능선을 잇는 아름다운 숲길입니다. 이따금 그저 마음을 놓고 울창한 소나무 사이를 걷고 싶을 때면 명봉산 정상이 아닌 진달래길로 우회합니다. 진달래길은 이름처럼 겨울에서 봄 사이 진달래 필 무렵에 가면 특히 더 좋습니다.
산은 산뜻합니다. 진달래길 갈림길에서 명봉산 정상까지는 약 4km. 능선에 붙은 이후의 여정은 순탄합니다. 그저 눈앞으로 곧게 뻗은 산길에 두 다리를 맡기면 그만이기 때문입니다. 머릿속을 가득 채운 생각과 마음속을 가득 메운 감정을 비우고 정리하다 보면 어느덧 정상입니다. 가는 길에 지나치는 몇 개의 바위를 보며 현재 어디쯤 왔는지 가늠하는 정도일 뿐 명봉산에 있는 동안 저는 시계를 보지 않습니다. 시간을 잊는 곳, 현재를 잊고 잠시 나 자신마저도 잊는 곳. 뒷산은 우리에게 그런 곳이 아닐까요?

어느덧 명봉정 삼거리에 도착합니다. 말발굽처럼 굽어지는 산길에서 잠시 외따로 이탈한 곳에 명봉산 정상이 있습니다. 마치 작은 섬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정상에 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길은 어떤 비밀의 방에 머물다가 나오는 것도 같습니다. 산 정상에는 정상석 외에 아무것도 없지만 아무것도 없기에 꽤 오래 홀로 머물 수 있습니다. 여름과 가까워지는 만큼 해가 지는 순간도 점점 뒤로 미뤄집니다. 하루가 길어지는 것 같아 여유로운 요즘입니다.
산속에 간신히 남아 있는 빛을 밟으며 천천히 하산합니다. 풀이 흔들리는 소리, 새가 지저귀는 소리 같은 것을 들으며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명봉산 산행 중 제가 가장 좋아하는 길입니다. 이따금 정체 모를 낯선 생명체와 산길 한가운데에서 마주치기도 하는데 그들은 잠시 놀라 희번덕거리며 눈을 밝힐 뿐 누군가를 해칠 의도는 애초 없다는 듯 이내 자신의 길을 갑니다. 그렇게 사라지고 나면 내가 꿈을 꾼 것인지 헛것을 본 것인지 잠시 헷갈립니다. 작가·에디터
#명봉산 #수목원 #장보영 #마무리 #진달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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