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의 고통마저 예술의 도구로 쓰려는 영화감독 아버지에 대하여 [2025 칸영화제]

김유태 기자(ink@mk.co.kr) 2025. 5. 22. 1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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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칸영화제는 세계 영화의 가장 뜨거운 현장이자 지금 이 순간 세계인이 열광하는 시네마의 준거점입니다. 2025년 제78회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후보인 ‘경쟁 부문(In Competition)’ 진출작과 관련한 소식을 현장에서 빠르게 전해 드리겠습니다.
요아킴 트리에의 ‘센티멘탈 밸류’의 한 장면. 주인공 노라와 그의 여동생 아그네스의 모습입니다. 연극 배우 노라는, 자신의 영화를 위해 고통스러웠던 가족사를 도구화하는 아버지에게서 주연배우 출연을 제안받은 뒤 극심한 갈등을 겪습니다. [IMDb]
프랑스 칸영화제에서 올해의 가장 긴 기립박수가 나왔습니다. 칸 경쟁 부문에 진출한 요아킴 트리에르 감독의 신작 ‘센티멘탈 밸류’가 무려 15분의 기립박수를 받은 겁니다. ‘19분’이란 외신 보도도 있지만 칸 기립박수는 모두가 일어서서 박수를 치는 그 순간부터 측정하기 때문에 15분이 정확할 겁니다. 보통 10분을 넘기기 어려운 칸 기립박수에서 15분도 상당히 긴 시간입니다.

칸 기립박수는 현장 관객들이 느낀 감동의 깊이를 반영하는 중요한 단서입니다.

21일(현지시간) 칸영화제가 열리고 있는 팔레 드 페스티벌(축제의 궁전) 드뷔시 극장에서 2025년 칸의 화제작으로 부상한 ‘센티멘탈 밸류’를 살펴봤습니다.

주인공은 연극무대에서 활동하는 배우 노라입니다. 그는 한때 유명했던 영화감독 구스타프의 딸입니다. 같은 예술의 길을 걷지만 두 사람은 관계는 꽤 복잡하고 어색합니다. 구스타프의 아내이자 노라의 엄마가 사망한 뒤 사실상 두 사람은 연락을 끊은 상태였기도 했고, 유년기의 노라가 아버지의 영화에 출연했을 때 아버지는 딸이 느낄 고통 대신 본인의 예술혼만 앞세우는 스타일이었기 때문이었지요.

‘센티멘탈 밸류’의 출연진과 요아킴 트리에 감독(맨 오른쪽)이 21일(현지시간) 팔레 드 페스티벌 레드 카펫 위에 선 모습. 왼쪽부터 아그네스 역의 잉가 입스도테르 릴레오스, 레이첼 캠프 역의 엘르 패닝, 노라 역의 레나타 레인스베, 구스타프 역의 스텔란 스카르스고르드, 그리고 요아킴 트리에르 감독. 레나타 레인스베는 이번 영화에서 깊은 감정선을 유지하는 연기를 펼쳤는데, 2021년 이미 요아킴 트리에르 감독의 영화를 통해 칸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기 때문에 이번에는 여우주연상 가능성은 없어 보입니다. [AFP·연합뉴스]
재회한 부녀는, 그러나 반갑게 인사합니다. 성공한 연극배우인 딸과, 거장 반열에 오르진 못했을지언정 진심을 다해 예술로서의 영화를 만들어온 아버지는 예우를 갖춥니다.

하지만 구스타프가 노라에게 두툼한 스크립트를 건네며 자기 영화의 주연을 맡아달라고 요청하면서 둘의 갈등이 폭발합니다. A4용지로 200쪽쯤 될 법한 두툼한 저 스크립트는, 부친 구스타프의 ‘자살한 어머니’에 관한 영화였습니다. 구스타프는 노라에게 “이건 너를 생각하며 쓴 원고야. 한 번 읽어보기만이라도 해봐”라고 요청하지만 노라는 크게 화를 냅니다.

다소 시간이 흐르고, 한 영화제에 참석한 구스타프는 자신을 진심으로 존경하고 추앙하는 할리우드 유명 스타 레이첼 캠프와 식사자리에서 교감을 나누게 됩니다. 캠프는 구스타프의 예술혼을 깊게 존경했습니다. 하여 그의 영화적 여정에 동참키로 합니다. 캠프가 구스타프 새 영화의 주연으로 낙점되면서 노라와의 갈등이 본격화됩니다. 구스타프의 영화 제작은 어떤 결말을 맞이하게 될까요.

여기까지가 초반부 설정입니다.

레나타 레인스베는 이번 영화에서 깊은 감정선을 유지하는 연기를 펼쳤는데, 2021년 이미 요아킴 트리에르 감독의 영화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를 통해 칸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기 때문에 올해 여우주연상 가능성은 희박해 보입니다. [AFP·연합뉴스]
배우 레나타 레인스베에게 2021년 칸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안긴 영화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의 한국 포스터. [그린나래미디어]
영화 ‘센티멘탈 밸류’는 가족 간의 상처와 화해에 관한 영화입니다.

세상 어떤 가족이든지, 그 가족 구성원들 심연 속에는 복잡한 감정과 관계적 함수가 엉켜 있곤 하지요. 구스타프와 노라의 부녀관계는 이 갈등을 포착합니다. 특히 구스타프의 신작은, 이들 가족이 4대째 살아가는 붉은색 목조 저택에서 촬영되는데, 실제로 가족들이 살았던 공간에 타인이자 이방인인 캠프가 끼어들면서 감정은 실타래처럼 꼬여갑니다.

아울러 이 영화는 예술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도 담고 있습니다.

전혀 관련도 없는 외부인이 한 가족의 서사에 끼어들고, 이를 통해 한 편의 예술이 만들어질 때, 그 가족이 느꼈던 깊은 슬픔은 예술을 위한 ‘도구’로 전락할 위험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술인으로서의 아버지와, 한 집안의 구성원으로서의 아버지는 ‘실제 서사를 반영한 예술’ 내에서는 일치화되기 어려운 문제를 담고 있지요. 하지만 예술이란 고통을 극복하는 수단이 되기도 합니다. 어려운 문제이지요.

요아킴 트리에 ‘센티멘탈 밸류’ 포스터. [IMDb]
영화 ‘센티멘탈 밸류’의 원제는 노르웨이어 ‘AFFEKSJONSVERDI’입니다. 이 영화의 본래 제목이기도 하지요. ‘sentimental value’와 ‘affeksjonsverdi’는 동일한 뜻인데, 금전적 혹은 경제적 가치는 없지만 정서적인 가치를 갖고 있어 쉽게 버리지 못하는 것에게서 느끼는 감정을 말합니다. 효용과 쓸모의 가치가 아무리 우선시되더라도 가족은 버리기 어려운 존재들이기도 합니다. 이 영화에서 노라는 여동생 아그네스와 대화하면서 붉은 유리 꽃병을 보며 ‘affeksjonsverdi’를 언급합니다. 이 유리 꽃병은 상징적이지요.

특히 이 영화에선 레이첼 캠프 역을 맡은 엘르 패닝에 주목하게 됩니다.

그녀는 뤼미에르 대극장에서 ‘센티멘탈 밸류’가 상영된 뒤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 영화의 출연자이면서, 동시에 이 영화의 정서적인 감동이 워낙 컸기 때문으로 이해됩니다.

‘센티멘탈 밸류’에서 레이첼 캠프 역을 맡은 배우 엘르 패닝이 21일(현지시간) 칸 뤼미에르 대극장에 들어서기 전 레드 카펫 위에 선 모습. [AFP·연합뉴스]
요아킴 트리에르 감독은 24일(현지시간) 저녁 칸영화제 시상대에 설 수 있을까요. 수상이 기대되는 또 하나의 수작입니다.
요아킴 트리에르의 영화 ‘센티멘탈 밸류’ 칸 프레스 티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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