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읽기] 투명한 얼굴과 마주하기

5월이 되면 프랑스 남부의 해안 도시 칸은 영화의 도시로 변모한다. 13일 개막 축포를 쏘아 올린 올해 칸영화제도 다르덴, 웨스 앤더슨, 리처드 링클레이터, 린 램지 등 가슴 설레는 이름들로 뜨겁게 예열된 상태다. 심사위원장 쥘리에트 비노슈를 위시한 심사위원들의 최종 선택은 24일 폐막식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올해 칸의 선택 또한 모험으로 가득하기를 기대해본다.
지난해 칸영화제의 선택은 숀 베이커 감독의 ‘아노라’였다. 이 결과가 흥미로운 이유는 더 원대한 영화적 야심과 심오한 철학적 고민과 새로운 미학적 시도를 품은 영화들을 제치고 신데렐라 스토리를 비튼 스크루볼 코미디(계급과 성격이 판이한 남녀의 결합을 코믹하게 다룬 장르)의 미국 영화에 콧대 높은 칸영화제가 최고상을 안겼다는 데 있다. ‘아노라’는 올해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도 5관왕(작품상·감독상·여우주연상·각본상·편집상)의 쾌거를 이뤘다.
‘플로리다 프로젝트’의 감독으로 잘 알려진 미국의 독립영화 감독 숀 베이커는 트랜스젠더와 포르노 배우 등 비주류들이 지닌 무지개 너머의 삶에 자주 주목했다. 교양과 품위 대신 생존의 기술로 뻔뻔함을 장착한 인물들, 혹은 하루에도 몇번이고 고성을 질러야 하는 인물들의 이야기. ‘아노라’의 주인공도 낮보다 밤이 익숙한 인물이다. 뉴욕에서 스트리퍼로 일하는 아노라(마이키 매디슨)는 어느날 클럽을 찾은 러시아 재벌 2세 이반을 상대한다. 철없는 이반은 아노라에게 클럽 밖에서의 만남을 제안하고, 두 사람은 일주일 만에 속전속결 결혼까지 해버린다. 이반의 부모는 사람들을 고용해 결혼을 무효화하려 한다. 겁에 질린 이반은 아노라를 남겨둔 채 도주하고, 아노라와 고용인 3인방은 이반을 찾아 뉴욕을 떠돈다.
‘아노라’는 하류층 여성이 상류층 남자를 만나 신분 상승할 뻔한 이야기로 시작하지만, 동화의 결말을 답습하지는 않는다. 우선 영화에 백마 탄 왕자는 없다. 다음으로 영화는 아노라와 이반의 쌍방향 러브 스토리에 별 관심이 없다. 영화는 극중 인물 중 가장 주체적이고 주도적인 아노라의 노동과 일상을 생생히 끌어안으며 말도 안되는 소동극을 이어간다. 그리하여 우리가 마주하게 되는 것은 아노라라는 한 사람의 투명한 얼굴이다. 그 투명한 얼굴 너머엔 너무도 인간적인 마음이 있다. 그 마음에 공명하게 되는 것은 영화가 부리는 마술이다.

이주현 영화칼럼니스트
Copyright © 농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