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등산 숲 속 ‘지식의 숲’…다독가가 지은 ‘책을 위한 집’
법치의학자로 세월호·제주항공 등 참사 현장서 7천여건 신원 확인
1년 책 구입비 1천만원 넘는 책 덕후…2만5천권 서고 위해 3층 집 1층 내어줘
EBS ‘건축탐구-집’에 소개돼 화제…향후 ‘숲 속 작은 도서관’ 운영 계획

◇2만5000권의 책 향기
‘생각을 따라가는 집’이라는 뜻의 ‘추사재(追思齋)’ 주인은 치법의학자 윤창륙(70) 조선대 치과대학 명예교수다. 서울 출신으로 1989년 조선대와 인연을 맺은 그는 “이제 서울이 제 2의 고향”이라며 웃었다. ‘지나온 생을 반추해보고 미래를 지향하는 집’이라는 생각을 담은 ‘추사재’는 정말 ‘책’을 위한 집이었다. 2만 5000여권의 책을 품은 1층 서재는 4.5m에 달하는 높은 층고가 인상적이었다. 책이 햇빛에 취약한 점을 감안해 창은 천장 바로 아래 수평으로 길게 냈는데, 창 너머로 흔들리는 푸른 나무가 풍취를 더한다. 25㎝, 12단으로 짜 맞춘 책장에는 이중 삼중 빽빽이 책이 꽂혀 있다. 서고로 쓰는 북구의 또 다른 아파트에도 1만여권의 책을 보관중이다.

“흔히 집을 지을 때 ‘언덕 위의 하얀 집’처럼 예쁘고 깔끔한 집을 떠올리는데 책을 읽으며 집이라는 건 내 삶을 반영하고, 내가 앞으로 하고자 하는 일들을 할 수 있는 삶의 터전이어야한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좋아하는 책을 위한 공간이자 내가 책을 읽을 공간을 만들었죠. 무엇보다 은퇴 후 청소년들, 어린이들이랑 함께 책을 읽고 생활하고 싶은 마음으로 설계를 했습니다.”
그의 독서는 장르를 가리지 않는다. 역사, 철학, 언어학, 시, 소설, 경제, 장르문학, 만화책 등을 아우른다. 대학 시절부터 많은 영향을 받아 수시로 꺼내보는 책, 정신과 의사가 쓴 책, 언론인과 법조인이 쓴 책 등으로 구분해 정리해 두기도 한다.

“100번도 넘게 읽은 책이에요. 조선의 얼, 조선 혼 이런 이야기들이 나오는데 고등학교 1학년 때 처음 읽었을 때 가슴이 뛰더군요. 시간이 날 때마다 곁에 두고 꾸준히 읽습니다. 지금도 읽을 때면 여전히 가슴이 뛰어요.”
제일 좋아하는 작가는 소설가 손창섭이다. “하나의 언어가 사라질 때마다 하나의 영혼이 사라진다”고 말했던 노암 촘스키의 책도 거의 다 읽었다. 소설가 정찬주와 나쓰메 소세키는 전작을 읽으려 한다. 소세키의 작품을 원본으로 읽고 싶어 현재 일본어 공부에 열심이다. 한쪽에는 서양미술사 등 미술관련 책이 수북히 쌓여 있다. 그를 이 세계로 이끈 건 ‘현대미술의 아버지’로 불리는 폴 세잔이다. 미학과나 미술사 대학원을 가볼까 생각중이다. 그와의 대화는 세균, 시와 시인, 건축, 미술, 언론, 사진 등 전방위로 이어졌다.

1993년 서울집에 불이 나 8000여권의 책이 불타버린 일은 못내 아쉽다. 대전 헌책방에서 구입한 ‘혈의누’ 1906년 초판본과 ‘산악서적 도서관’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으로 모은 2000여권의 산 관련 책도 거의 불탔다. 작가들에게 기증받은 책은 꼭 다시 서점에서 구입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작가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는 하루 1시간 정도는 책과 관련한 인터넷 서칭을 한다. 많을 땐 1년에 1000만원 정도를 구매했고 최근에는 매달 책 구입비로 50만원 정도를 쓴다. 그는 가장 좋아하는 게 책과 술이라고 말할 정도로 애주가다.
“예전에는 당연히 술을 골랐는데 주량이 3분의 1로 줄면서 책이 우선 순위가 됐습니다.(웃음) 포도주를 좋아하게 되면서 또 포도주 관련 책을 수 없이 읽었죠. 책을 읽다 죽었으면 좋겠는데 말이죠.”
학교에 근무할 때 퇴근 시간은 새벽 3~4시였고 수면 시간은 하루 3시간에 불과했다. 지금은 5~6시간 자는데 토일요일 방해받지 않고 온 종일 책을 읽는 시간이 가장 행복하다.

윤 교수의 또 다른 삶은 ‘죽음’과 연결돼 있다. 그는 국내에 채 10명이 안되는 법치의학자로 치아를 감정해 시신의 신원을 식별한다. 법의학자의 길은 운명처럼 다가왔다. 부모 뜻에 따라 치대에 들어갔지만 적응할 수 없어 예과를 4년이나 다녔던 그의 피난처는 ‘산’이었다. 1년에 250일 이상 산을 찾았던 그는 프랑스 국립등산스키학교에 입학해 알피니스트가 되고 싶다는 꿈을 꾸기도 했지만 허리를 다쳐 포기했다. 그러다 본과 3학년이던 1981년 연세대 김종열 교수의 법의학 강의를 들은 후 그의 삶은 달라졌다.
“사법고시를 볼까, 기자를 할까 생각이 많았던 시기였어요. 법의학 강의를 듣고 모골이 송연해지더구요. 법의학은 사람이 죽었을 때 왜, 언제, 어떻게 죽었는지 살펴 그 죽은 사람이 누구인지 찾아내는 겁니다. 일반적인 의학이나 치의학이 생명을 존중하는 학문이라고 한다면 법의학은 사람의 인권을 존중하는 학문이라는 사실을 배웠어요. 학교를 졸업하고 교수님의 첫번째 제자가 됐죠.”
사고 현장에는 언제나 그가 있었다. 지난해 제주항공참사를 비롯해 삼풍백화점, 세월호 참사 등에 참여했고 2001 광주민주화운동 희생자 발굴, 제주 4·3항쟁 희생자 신원 확인 작업에도 함께했다. 35만명 이상 사망한 태국 쓰나미 현장도 찾았다. 그가 신원을 확인해 유족 품에 돌려보낸 7000여개의 ‘개인식별’ 케이스는 전 세계에서 손꼽히는 수치다.
“이게 참 슬픈 일인데, 제가 능력이 출중해서 이렇게 많은 케이스를 진행할 수 있었던 게 아니라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어요. 급격한 산업화와 민주주의를 이루는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광복 이후 좌우 대립이 격해지면서 많은 희생자가 나왔어요. 빨리빨리 문화가 성행하고 배금주의 사상에 물들면서 사건사고도 너무 많았고요.”
그의 인생의 전환점이 된 사건은 2014년 세월호 참사와 2003년 대구 지하철 참사였다. 팽목항에 내려가 두 달간 머물며 신원확인 작업을 했고, 지하철 참사 때는 72일간 매달려 미확인 희생자 6명을 뺀 사망자의 신원을 모두 밝혀냈다.
“대구 참사 때는 감식하며 혼자 참 많이 울었어요. 돌아가신 분들이 모두 평범한 시민들 아닙니까. 이 사람들이 왜 이런 일을 당해야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죠. 저보다 세상을 더 순박하게 살았을테고, 다른 사람한테 나보다 더 인정있게 대했을텐데 이런 분들이 세상을 떠나고 그들보다 잘난 것 하나 없는 나는 살아 있다는 생각에 그냥 안에서 분노와 설움이 복받쳐 눈물이 쏟아졌어요. 세월호는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물속에서 시체를 건지면 다 부패하고 썩어 있어요. 시체가 떠오를 때마다 부모들은 시신의 얼굴에 당신들의 얼굴을 부비며 아들아 미안하다. 딸아 내가 잘못했다고 울부짖고 실신하셨죠. 그 때는 눈물도 안나오더라고요.”
그의 카톡 배경은 세월호 당시 대구 여교생이 보낸 메모지를 촬영한 사진이다. 11년의 세월이 지났지만, 여전히 세월호는 마음 속에 있다고 말하는 그의 눈시울이 젖어 들었다.
추사재는 ‘숲속작은 도서관’으로 운영하기 위해 도서관 등록요건을 갖췄다.
“작은도서관으로 완전히 오픈을 하지는 않았지만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아요. 2년전부터 동네 청소년들이 와서 책을 읽다 가곤합니다. 공부도 하고요. 근처 유치원 꼬맹이들은 단체로 방문하기도 합니다. 운영방식 등은 고민해 볼 생각입니다.”
책을 좋아하는 지인과 취재에 동행해도 되느냐는 말에 그는 이렇게 답장을 보냈다. “책에 관심 있고 책을 좋아하시는 분은 누구든, 언제든 환영합니다. 그것이 이 집 추사재의 존재 이유니까요”라고. 추사재가 ‘모두의 도서관’이 될 날을 기다려본다.
/글·사진=김미은 기자 mekim@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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