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석훈의 보물섬] 남북 대립으로 불 꺼졌던 연평도 등대의 역사

연평도 등대는 1960년 첫 불을 밝힌 이래 지금까지 어느 지역의 등대보다 우여곡절이 많았다. 1974년 등대 불이 꺼졌다가 2019년에 다시 켜진 것이다. 이유인즉슨 남북 관계의 긴장과 완화가 반영되었기 때문이다.
연평도 등대의 설치
지난 글에서는 1939년 해주항 번영회에서 연평도 등대를 신설할 것을 처음 진정한 이후 1960년 완성되기까지의 과정을 알아봤다. 이 당시 연평 앞바다는 조기로 넘쳐났고, 조기를 잡는 어선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모여들었다. '돈 벌러 가세'나 '군밤 타령'과 같은 노래의 배경은 이 당시 연평도가 풍어로 돈이 넘쳐나는 상황을 의미한다. 마침내 빈번하게 출입하는 선박 안전과 해주항의 발전을 위해 1960년 등대 설치에 이르게 됐다. 이 당시 신설되는 등대의 모습과 이후 역사를 살펴보자.
당시 관보(2560호, 1960.4.20.)의 해무청 고시(제502호)를 보면 등대 신설일은 1960년 3월30일이다. 무신호 취명 시간은 매 50초에 2회이며, 광달거리 26㎞이다. 도색 및 구조는 백색 4각형 철탑조이며, 등질은 섬백광 10초 2 점등, 등대가 해상에 빛을 밝히는 명호(明弧)는 235~326°, 343~161°, 등탑 높이는 9.5m이다. 등대 건물 모습은 원통형 같은 일반적 형태의 모습과 달리 3층을 이루는 구조이다. 1층은 정사각형의 사무동으로 살림을 겸했고, 그 위에 2층의 망루를 올렸다. 망루 위에 등명기를 노출해 불을 밝혔다. 이 당시 등대지기는 본 섬 출신의 한영철(작고)이었다. 이에 대해 연평도 출신인 홍운영(인천 논현동 거주)는 "당시 최승진 면장이 나에게 한 번 해보라는 권유가 있었지만 포기했고, 대신에 면장의 매제인 한영철이 초대 등대장으로 근무했어. 등대 건물은 60년 이전에 이미 지어진 것으로 기억되는데, 내가 결혼(1956)하고 1~2년 후에 지은 것 같다"고 증언했다.
점등 이후 1960~70년대 전반까지 연평도 등대는 남북 관계의 직접적 영향을 받았다. 특히 60년대 말부터 1970년대 이후 북한의 해군력이 발전하면서 NLL을 무력화하기 위해 침범하는 사례가 늘었다. 우리 어선이 나포되는 일이 빈번해지는 등 일촉즉발의 남북 군사적 대치가 심화되었다. 이때 우리 정부에서는 북한이 침투할 때 등대 불빛을 이용할 수 있다는 군사적 이유로 1974년 7월1일 소등했다. 백령도 용기포 등대로 이때 소등되었다. 게다가 10여 년이 지난 1987년에는 소등 상태가 지속되면서 시설물 폐쇄는 물론 등대원도 철수시키면서 유인 등대가 훗날 무인 등대로 변하였다.

/김석훈 인천섬유산연구소 이사·문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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