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어떤 대선주자도 말하지 않는 전세사기: 빌라와 공포, 그리고 '기펜재'

한정연 기자 2025. 5. 20. 1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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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사기 피해자 계속 나오지만
대선 경제 토론회서 언급 없어
수요법칙 안 따르는 기펜재처럼
일본 쌀·한국 빌라 경제논리 역행
비싸면 많이 사고, 싸면 적게 사
전세사기 공포, 빌라 매매 실종 원인
피해자로 인정 못 받는 현실도 원인

# 자신만의 색깔을 드러내는 게 중요한 대선후보 사이에서 비슷한 면을 찾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이번 21대 대선 경제분야 토론회에서 후보 4명은 확실한 공통점이 있었다. 이들 모두 전세사기 문제를 언급하지 않았다.

# 전세사기는 명백한 경제 문제다. 전세사기 피해자 대다수는 빌라 세입자이고, 우리나라 빌라는 시간이 갈수록 수요의 법칙을 거스르는 '기펜재'적 특징을 갖고 있다. 빌라의 속성과 전세사기 공포증을 알아봤다. 다소 낯선 '기펜재'의 의미는 용어설명에서 간단하게 설명했다.

지난 19일 오전 서울 용산구 서울역 대합실 TV에서 전날 열린 대선 후보자 초청 경제분야 토론회 관련 뉴스가 보도되고 있다. [사진 | 뉴시스]

일본에서 쌀 가격 급등 문제가 좀처럼 잡히지 않으면서 일본에서 쌀이 기펜재(Giffen's goods·용어설명 참조)일 수 있다는 의견이 나왔다. 기우치 다카히데 노무라종합연구소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20일 "쌀 가격이 급등했지만, 구매량은 줄지 않았고, 수요가 빵 등 대체소비재로 크게 이동하지도 않았다"며 "일본에서 쌀이 기펜재의 특성을 보였을 가능성을 부정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기우치 수석의 주장이 눈길을 끄는 이유는 기펜재가 경제학에서 거의 찾아보기 힘든 희귀한 경우여서다. 소득이 그대로일 때 어느 상품의 가격이 오르면 수요는 줄고, 가격이 내리면 수요는 늘어나기 마련이다. 그런데 가격이 하락하면 오히려 덜 팔리고, 가격이 오르면 더 팔리는 재화가 있다. 경제 논리를 역행하는 이런 재화를 '기펜재'라고 한다.

기펜재는 유니콘 같은 존재다. 이론상으로는 가능하지만, 실제로는 발견되지 않는다. 기펜재의 가장 큰 특징은 수요의 법칙을 거스르는 돌연변이라는 점이다.

쉽게 말해 소고기보다 상대적으로 저렴한 돼지고기처럼, 소득이 늘어나면 수요가 오히려 줄어드는 것을 열등재라고 하는데, 이 중에서 가격이 오르는데도 수요가 증가하고, 가격이 내리면 오히려 수요가 줄어드는 재화가 기펜재다.

대체로 어쩔 수 없이 사야 해서 사는 것들이다. 일부 경제학자는 1940년대 아일랜드의 감자, 2000년대 초반 중국과 아프가니스탄의 쌀과 밀을 기펜재라고 주장한다.

쉽게 풀어보자. 아일랜드에서는 1840년대 감자 기근이 발생해 감자 가격이 폭등했다. 하지만 아일랜드 사람들은 감자 소비를 오히려 늘리고, 고기나 채소 등 소비를 줄였다. 그런데 기근이 끝나 공급이 충분해져 감자 가격이 내려갔지만, 사람들은 감자 소비를 늘리는 대신 오히려 줄였다. 감자가 지긋지긋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일랜드 사람들은 감자 소비를 최소한으로 줄이고, 남은 돈을 다른 식품을 사는 데 썼다.

경제학자들은 아일랜드의 감자 문제는 기근이라는 확실한 문제가 있어서 공급량이 감소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며, 이를 기펜재의 예로 보기 힘들다고 지적했다. 노무라연구소가 2025년 일본의 쌀을 기펜재로 의심한 건 일본에 특별한 기근이 발생하지 않았는데도 쌀값이 폭등했고, 그럼에도 수요가 줄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도 기펜재의 특징을 가진 것으로 의심할 만한 재화가 있다. 연립과 다세대주택을 통칭하는 빌라다. 연립과 다세대주택은 주택시장에서 열등재라고 봐도 무방하다. 우리는 아파트가 비싸고, 단독주택이 비싸서 빌라를 산다. 서울 아파트 가격이 오르면, 지방 아파트 수요가 증가하고, 그로 인해 지방 아파트까지 비싸지면, 빌라 매매가 늘어나 매매가격이 오르는 경우가 많다.

[일러스트 | 게티이미지뱅크]

한국 빌라는 최근 들어서 기펜재로 의심되는 특징을 점차 갖추기 시작했다. 빌라 가격 상승기에는 매매건수가 많이 증가하면서 가격이 더 올랐다. 하지만 2023년 이후 빌라 매매가격이 폭락을 거듭하자 빌라를 사는 사람은 극단적으로 줄었다.

국토교통부 실거래가 시스템을 보면, 2020년 6월 빌라 거래량은 2만1244건이었다. 하지만 2021년 6월 1만7971건, 2022년 6월 1만2066건, 2023년 6월 7043건, 2024년 6월 6382건, 2025년 5월 19일 기준 1602건으로 급감했다. 그 결과 연립과 다세대 경매 건수는 서울에서만 3년 만에 4배 증가해 지난해 2분기 4259건을 기록했다. 가격 책정이 불가능한 수준이다.

그렇다고 우리나라 빌라가 기펜재라고 섣불리 결론 내릴 수는 없다. 1940년대 아일랜드의 감자가 기근과 같은 확실한 이유가 있어서 기펜재로 볼 수 없는 것처럼, 빌라 매매의 이상 현상에도 확실한 이유가 있어서다. 자신도 전세사기 피해자가 될 수도 있다는 공포, 그리고 '전세사기 피해자'로도 분류되지 않을 수 있다는 우려다.

'전세사기 피해자 지원 및 주거 안정에 관한 특별법(전세사기 특별법)'에 따라 전세사기 피해자로 인정된 사람은 올해 3월 기준 2만7000명이다. 20·30대가 대부분이다. 전세사기 피해자의 25.9%가 20대, 48.8%가 30대다. 아파트는 14.4%에 불과하다.

피해자가 이렇게 적은 것은 법이 전세사기에 관대해서다. 법원은 전세 보증금을 돌려주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는 집주인에게 사기 고의가 있다고 판단하지 않는다. 사기 고의라는 것은 계약 시점에 집주인이 세입자를 속일 의도가 있었는지 여부다.

이를 입증하는 것은 돈을 못 받은 세입자의 몫이다. 전세사기 피해자로 공인받지 못하면 세입자는 집주인을 상대로 민사소송을 해서 이겨야 보증금을 돌려받는다. 피해자가 혹시라도 승소한다고 해도 소송 비용은 물론이고 전세 보증금조차 돌려받지 못할 공산이 크다. 이미 빌라의 가치는 땅에 떨어졌고, 경매 물량은 쌓이고 있기 때문이다.

차라리 한국 빌라가 정말 기펜재였다면 해결책이 존재했을 것이다. 어떤 식으로든 빌라의 잠재적 구매자들 소득과 자산을 늘려주거나, 빌라 대체재인 단독주택과 아파트 입주 가능성을 높여주거나, 가격을 더 내려준다면 빌라가 수요의 법칙을 거스르는 것을 방지할 수 있다.

하지만 빌라는 기펜재처럼 보여도 기펜재는 아니다. 전세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한 전세사기 피해자 태반이 공식적으로는 피해자가 아닌 것과 마찬가지다.

[자료 | 국토교통부 실거래가 공개시스템, 참고 | 2025년 5월은 19일 기준. 빌라는 연립과 다세대주택을 통칭]
[자료 | 통계청·한국은행·금융감독원 가계금융복지조사]

전세사기 문제가 대선판에서 실종된 데는 어쩌면 다른 이유가 있을지도 모른다. 영국 경제학자 앨프레드 마셜은 1890년 「경제학 원리」라는 책에서 영국 언론인 로버트 기펜의 말을 인용해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기펜이 지적했듯이, 빵 가격 상승은 가난한 노동자 가정의 수입을 모조리 흡수하고, 가난한 사람들의 돈의 한계효용(만족감)을 너무 많이 증가시켜 고기나 더 비싼 제철 식품 소비를 줄이게 만든다. 하지만 가난한 사람들에게 빵은 여전히 그들이 구할 수 있는 가장 저렴한 식품이기 때문에 더 많이 살 것이고, 절대 줄이지 않을 것이다."

이처럼 기펜재의 전제조건은 가난한 사람의 도저히 줄일 수 없는 필수적인 소비라는 점이다. 감자, 쌀, 밀이 기펜재로 의심됐던 이유다. 가격과 거래량만 보면 우리나라 빌라도 의심할 근거가 있지만, 감자가 기근이라는 확실한 이유가 있어서 기펜재 후보에서 최종 탈락한 것처럼, 빌라도 사회가 전세사기 피해자를 구제해 주지 않는다는 확실한 공포가 있어서 기펜재로 보기 힘들다.

그래서 이번 대선에서 '전세사기' 이슈가 사라진 건 안타깝다. 대선주자쯤 되면 가장 가격이 낮은 종류의 주거지에서 가장 젊고 가난한 사람들이 피해를 보는 전세사기엔 관심이 없어지는 걸까.

한정연 더스쿠프 기자
jeongyeon.han@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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