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혜영, 세월의 흐름을 초월한 여신의 오라
아이즈 ize 정수진(칼럼니스트)

이혜영의 연극 '헤다 가블러'를 관람했다. 헨리크 입센의 문제작 '헤다 가블러'의 주인공 헤다는 긴 신혼여행에서 갓 돌아온 새 신부. 게다가 다른 프로덕션에서 진행 중인 '헤다 가블러'엔 이영애가 헤다를 맡았다. 50대의 나이에도 독보적인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이영애와 대결 아닌 대결을 치르는 셈이라, 제 아무리 이혜영이라 해도 부담이 있지 않을까 싶었다. 기우였다. 가느다란 몸에 착 감기는 나이트 가운을 입고 나른한 듯 지리멸렬한 표정으로 등장하는 이혜영을 보면서 그의 나이를 떠올리는 관객은 없었을 거다.
그 전엔 이혜영의 영화 '파과'를 봤다. '파과'에서 이혜영이 맡은 조각은 60대의 나이에도 현역으로 활동하는 레전드 킬러다. 다만 나이를 거스를 순 없어, 회사에서도 점차 한물간 취급을 받는 중. 그런 와중 그 앞에 나타난 아들뻘의 젊은 킬러 투우(김성철)는 무슨 이유에서 인지 계속 조각의 심기를 건드린다. '파과'의 조각은 이혜영 본인의 연령대지만, 여전히 누군가의 목숨을 앗아가는 데 주저함이 없는 킬러라는 비현실적인 존재다. 그리고 이혜영만큼 비현실적인 존재를 현실에 그려내는데 익숙한 배우를 찾기 쉽지 않다.
배우들은 천의 얼굴을 해야 한다지만, 배우들마다 자신만의 강점이 있다. 어떤 배우는 캐릭터에 스며들 듯 얼굴을 갈아 끼우고, 어떤 배우는 캐릭터를 자신의 것으로 재가공해 빛을 낸다. 내 주변의 누군가처럼 자연스러운 생활 연기의 고수가 있고, 등장만으로 주변 공기의 흐름을 뒤흔드는 존재감 스틸러도 있다. 그리고 이혜영은, 존재감이란 단어를 사람으로 형상화한 자체라 해도 무방할 만큼 강렬한 아우라를 발산하는 배우로 꼽힌다. 그 특유의 목소리와 가만히 있어도 콘트라스트가 강하게 느껴지는 얼굴, 고혹적인 분위기를 보고 있으면 뭣 모르는 사람이 봐도 배우 아니면 무얼 했을까 싶을 정도다.
50대 이상의 사람들은 이혜영은 '충무로의 천재'라 불렸던 명감독 이만희 딸이자 '여왕벌' '티켓' '사방지' '성공시대' '개벽' '화엄경' 등 1980년대와 90년대 초의 영화 커리어로 기억할 것이다. 50대 미만의 사람들은 이혜영이란 존재를 드라마를 통해 알았을 가능성이 높다. 지금도 "아들~"이란 간드러진 목소리의 성대 모사가 현재진행형인 드라마 '미안하다, 사랑한다'의 오들희를 비롯해 '패션 70s'의 장봉실, '꽃보다 남자'의 강희수, '내 마음이 들리니'의 태현숙, '마더'의 차영신으로 이혜영은 우리에게 다가왔다.
오들희, 장봉실, 강희수, 태현숙, 차영신은 모두 주인공의 엄마 역할인데, 보통의 한국 드라마에서 느슨하게 표현하는 엄마와는 차원이 달랐다. 이혜영이 맡은 엄마들은 자식에 대한 사랑과는 별개로 자식과도 긴장감을 자아내는 인물들. 오들희에게 버려졌다고 여겨 복수를 꿈꿨던 친자식 차무혁(소지섭)과의 긴장관계는 말할 것도 없고, 어머니이기보다 한국 최고의 디자이너이길 택했던 장봉실이나 그룹과 가문의 안위를 위해 자식도 도구처럼 취급할 수 있는 강희수는 자식과 오붓한 관계의 엄마와는 거리가 멀었다. 심지어 입양한 딸들에게 지극한 모성을 보인 '마더'의 차영신마저도 자식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기꺼이 하려 하지만 여느 드라마의 엄마들처럼 음식으로 애정을 표현하는 엄마는 아니었다. 오히려 자식을 버린 친모의 뺨을 올려붙이며 화를 터뜨리고, 다른 자식들의 안위를 위해 범죄를 저지른 딸을 파양으로 끊어낼 결심을 하는 차갑고도 뜨거운 엄마여서 눈길을 끌었다.

엄마이든 노인이든 한시도 여성성을 놓지 않는 것도 이혜영이 맡은 캐릭터들의 특징. 오들희나 차영신이 화려한 왕년을 보낸 여배우 출신이라 그런 것도 있지만, 작품에서 이혜영을 선택한다는 것 자체가 이혜영이 지닌 이미지를 적극 활용하겠다는 심산이니 당연한 것이리라. 심지어 엄마도 아니고 그저 늙은 킬러일 뿐인 '파과'에서도 투우와의 대면 신에서 섹슈얼한 텐션이 도드라진다. 후반부에 조각과 투우의 관계의 특징이 드러나긴 하지만, 이혜영이 서른 살 가까이 차이 나는 투우 역의 김성철과 갑자기 키스를 나눈다 해도 놀랍지 않은 분위기였다. 그리고 이혜영에겐 그런 걸 자연스럽게 납득시키는 힘이 있다.
영화 '파과'와 연극 '헤다 가블러'로 세간의 화제이 집중된 이혜영. 심지어 최근엔 2004년작 '미안하다, 사랑한다' 또한 OTT와 유튜브 채널을 통해 역주행되는 조짐이다. 특히 '뿅뿅 지구오락실3'에서 '미사폐인' 이은지가 '미안하다, 사랑한다'를 인생 드라마로 소개하고, 오들희의 명장면을 높은 싱크로율로 재연하며 미미, 이영지, 안유진 등 다른 MZ 연예인들에게 '입덕'을 불러 일으킨 것이 주효했다. '미안하다, 사랑한다'는 티빙, 웨이브, 쿠팡플레이, 왓챠 등 주요 OTT 플랫폼에서 볼 수 있고, 유튜브에서 몰아보기 영상과 분석 영상, 리액션 영상까지 수두룩 빽빽하니, 2025년의 조각과 헤다와 2004년의 오들희가 동시대에 인기를 끄는 묘한 광경인 셈이다.
연극 간담회에서 이혜영은 '관객들과 '헤다 가블러'를 같이 만들어 나갈 때, 제 나이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연극이 아니어도 이혜영의 나이가 문제되지 않는다는 건 분명하다. 까랑까랑한 목소리로 치명적인 고혹을 발산하고, 줄 위를 위태롭게 걷듯 긴장을 선사하는 그의 다음 연기를 기다리고 있겠다.
정수진(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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