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_울산, 소설이 되다Ⅴ] 불 사랑 국경 없는 무언가 (8)

강정원 기자 2025. 5. 20. 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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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호 그림

원장이 혀를 찼다.

"미리가 저를요 아니 선생님이란 사람을 어떻게 생각하겠어요? 어른이 한 약속을 어떻게 생각하겠어요? 교실 들어가며 제가 분명히 부탁드렸었잖아요. 고구마 튀김, 미리 손에 꼭 들려 보내달라고요."

원장이 노기 띤 얼굴로 선혜를 바라보았다. 선혜는 앞치마를 벗어 탁자에 내려놓았다. 원장이 팔짱을 끼며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노동청 전화 받을 일은 없었으면 해요. 나도 그렇지만 원 선생에게 득 될 거 하나 없는 일이야. 좋은 경험으로 칩시다."

"만 원 주세요."

"무슨 만 원?"

"고구마 튀김값 만 원이요. 열한 개 드셨어요. 한 개 천 원인데 열 개 사고 하나 서비스로 받은 거예요."

선혜가 손바닥을 원장에게 내밀었다. 원장이 혀를 차며 책상 서랍에서 만 원을 꺼내더니 선혜의 손바닥에 탁 내려놓았다. 만 원을 움켜쥐고 교실로 돌아간 선혜는 가방을 챙겨 들고 출입문으로 향했다. 신발장에서 꺼낸 운동화에 발을 집어넣던 선혜가 두 발을 모으고 서서 운동화를 내려다보았다. 하원 차량 지도를 나갈 때마다 앞질러 달려간 미리가 꺼내 놓던 운동화였다. 선혜는 허리를 숙여 신발장의 맨 아래 칸을 살폈다. 코팅해 붙여 놓은 곰돌이 모양의 미리 이름표가 보였다. 미리의 이름 옆에는 작은 분홍색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사랑의 하츄핑이었다. 선혜는 쪼그리고 앉아 이름표를 손톱으로 살살 뜯어냈다. 순전한 눈망울의 하츄핑이 선혜를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붙인 지 오래되지 않은 이름표는 쉽게 떨어졌다. 이름표의 먼지를 겉옷에 문질러 닦은 뒤 주머니에 집어넣으며 선혜는 미리를 업고 병원을 다녀오던 그날을 생각했다. 고구마 튀김 봉지를 건네받는데 설핏 잠이 들었던 미리가 늘어진 두 팔을 들어 선혜의 목에 둘렀다.

"고구마 튀김 샀어. 금방 튀긴 거라 더 맛있대. 먹고 얼른 낫자."

고개를 반대쪽으로 돌리며 미리가 웅얼거렸다.

"응응…… 사랑해."

선혜는 미리를 업고 시장 골목을 걸어 올라갔다. '사자'란 단어를 처음 가르쳐 준 날, 미리는 손에 연필을 쥔 채 작고 동그란 얼굴을 선혜 뺨 가까이 가져오더니 속삭였다.

"사랑해, 할 때 사?"

갓 태어난 동생에게서 묻혀왔을 파우더 향이 포근했다.

"맞아. 사랑해, 할 때 사. 미리는 말도 참 이쁘게 하네."

사아아아. 글자를 쓰는 미리의 양 눈썹이 안쪽으로 모여 심각한 표정이 되었다. 선혜는 엄지로 미리의 미간을 살살 문질러 주었다.

뭉텅 잘라낸 뒤통수의 머리카락은 조금씩 자라나고 있을까. 꿰맨 상처는 덧나지 않고 잘 아물었을까. 약속에 사랑으로 화답했던 어린아이의 마음을 생각하자 선혜의 마음이 뻐근해졌다. 일의 진위를 가리고 뒤틀린 소문을 바로잡는 것보다 선혜의 마음이 더 쓰이는 것은 따로 있었다. 그것은 한 작은 아이가 선혜란 한 인간, 선생님이라 불렀던 어른에게서 받았을 불신과 실망으로 인해 생길 무의식의 상처였다.

선혜는 주머니 안에 손을 넣은 채 하츄핑이 붙은 이름표를 어루만졌다.

사랑해, 할 때 사아아아.

어린이집을 나와 버스 정류장 쪽으로 느린 걸음을 옮기며 선혜는 주문을 외듯 읊조렸다. 선혜를 지나쳐 막 정류장에 도착한 버스에서 두어 명이 내렸다. 이 정류장을 지나는 유일한 노선버스였다. 놓치면 한참을 기다려야 했지만, 선혜는 뛰지 않았다.  (계속)

 
강이라 소설가

# 강이라 소설가

제24회 신라문학대상과 2016년 국제신문 신춘문예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2019년 현진건문학상에 단편 「스노볼」이 추천작으로 선정되었다. 소설집 『볼리비아 우표』, 『웰컴, 문래』, 청소년 장편소설 『탱탱볼:사건은 문방구로 모인다』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