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요광장] 사람 마음도 통역이 되나요?

2025. 5. 20.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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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태 한국무역협회 대전세종충남지역본부장

제76회 아카데미 시상식 각본상 수상작으로 2004년에 개봉된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의 본디 제목은 'Lost in Translation'이다. 이는 통역이나 번역 과정에서 의미가 온전히 전달되지 않았다는 뜻으로, 우리말 제목은 번역가가 원제를 참고해 새롭게 창작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일설에 따르면 영화 개봉 당시 배급사 측은 원제를 그대로 사용할 경우 관객들이 공상 과학 영화로 오해할 수 있다고 판단해 번역된 제목을 붙였다고 한다. 이는 아마도 1998년에 선보인 SF 영화의 제목이 '로스트 인 스페이스'였던 게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통번역의 중요성은 말할 나위 없다. 우리나라에 두 번째로 노벨상을 안겨준 작가 한강의 작품도 영문 번역가 데버라 스미스를 만나 더욱 빛이 났다. 통번역은 서로 다른 세계가 만나는 지점에서 다리를 설계하고 짓는 일에 비유된다. 하나의 대화에서 마주하는 각각의 세계를 이해하며, 의미는 물론 문화적 맥락과 정서적 공감까지도 전달해야 하기 때문이다.

한 번 잘못된 통번역은 관성처럼 반복되어 후세대에도 그대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1990년 아카데미 시상식 각본상 수상작 'Dead Poets Society'는 우리나라에서 '죽은 시인의 사회'라는 제목으로 개봉됐다. Society는 사회라는 뜻 외에도 특정한 목적으로 결성된 협회, 모임, 동아리라는 의미를 갖기 때문에 이견도 있지만 '죽은 시인 협회' 정도의 번역이 적절하다.

안데르센의 동화 'Den grimme ælling'의 영어판 'The Ugly Duckling'이 우리나라에서 '미운 오리 새끼'로 번역돼 출간된 것도 다시 생각할 필요가 있다. 이미 관용 표현으로 굳어졌지만, 엄밀히 말해 '미운 새끼 오리'가 더 적합한 번역이다. 생쥐, 강아지, 송아지처럼 새끼 형태의 낱말이 따로 있는 경우를 빼고는 새끼 사슴, 새끼 호랑이처럼 단어 '새끼'는 동물 이름의 앞에 있어야 안정적이고 편안하다.

우리에게 익숙한 '판도라의 상자'도 잘못된 번역에서 나온 표현이다. 고대 그리스 작가 헤시오도스의 서사시 '신통기(神統記)'에 등장하는 '피토스(pithos)'는 술이나 곡물 등을 보관하던 흙으로 만든 입 큰 항아리를 의미한다. 16세기 인문주의자 에라스무스가 이를 라틴어로 옮기면서 '상자'를 뜻하는 '파이시(pyxis)'로 번역했고, 이후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의 그림에서 항아리 대신 황금빛 상자로 묘사되면서 '판도라의 상자'로 대중에게 각인됐다.

오역이 단순한 실수를 넘어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한 사례도 있다. 1945년 7월, 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에 연합국은 일본에 '무조건 항복'과 '완전한 파멸'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요구했다. 이에 대해 스즈키 간타로 총리는회견에서 "우리는 (포츠담 선언에 대해) '모쿠사츠(默殺)'할 따름이다"라고 말했다. 모쿠사츠는 크게 '논평을 유보하다(no comment)', '무시하다(ignore)'라는 두 가지 뜻을 갖는 단어다. 일본의 대외 선전매체 도메이통신은 영문 기사에서 이를 '유보한다'가 아닌 '무시한다'로 번역해 보도했다. 이 기사는 AP와 로이터 등 주요 통신사를 통해 즉각 전 세계에 전파됐다. 이후 뉴욕타임스는 "일본, 연합국의 항복 촉구 최후통첩을 공식 거부하다"라는 제목으로 기사를 보도했다. 이 보도를 접한 해리 트루먼 대통령은 사흘 뒤 원자폭탄 투하 명령서에 서명했고, 결국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폭탄으로 약 21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모쿠사츠 오역이 원폭 사용 결정의 직접적 원인이라고 단정 짓기는 힘들지만, 결정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는 의견이 많다.

또 다른 오역 사례는 1956년 소련 총리 니키타 흐루쇼프의 발언이다. 서방 국가들의 대사도 참석한 모스크바 주재 폴란드 대사관 축하 연회에서 흐루쇼프 총리가 "우리는 당신들을 묻어버리겠다(We will bury you)"라고 발언한 것으로 통역됐다. 실제 발언 의도는 "당신들이 소멸할 때도 우리는 건재할 것이다(우리는 자본주의보다 더 오래 살아남을 것이다, We will be present when you are buried)"였으나, 공격적 표현으로 잘못 통역되면서 제3차 세계대전까지 거론되는 외교 파장을 일으켰다.

문장이나 발언을 통번역하는 일은 그 자체로 쉽지 않다. 더구나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사람의 마음을 통역하는 일은 더욱 어렵다. 6·3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후보들은 길(문맥)에서 헤매지 않고, 국민들의 간절한 열망을 제대로 통역하고 있을까? 김용태 한국무역협회 대전세종충남지역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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