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훈, 라스칼라 최초 亞 음악감독 “36년 친구와 갑자기 결혼…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고 싶다”
라스칼라 극장 최초 동양인 음악감독
“단원들은 잘 통하는 사이…아무리 연주
잘해도 통하지 않으면 함께하기 힘들어”
[헤럴드경제(부산)=고승희 기자] “36년간 사랑스럽게 지낸 제일 친한 친구들이었는데, 이젠 결혼해 가족이 됐어요. (웃음)”
‘오페라 종가’ 이탈리아 라스칼라 극장과 처음 인연을 맺은 것은 1989년이었다. 라스칼라 247년 역사상 첫 아시아인 음악감독이 된 ‘지휘 거장’ 정명훈은 “어떤 유명 오케스트라에 초대를 받아도 책임을 맡기엔 ‘너무 늦었다’며 거절했는데, 라 스칼라만큼은 ‘노(No)’라고 할 수 없었다”고 했다.
정명훈의 선임은 일종의 ‘사건’이었다. 지난 12일 라 스칼라는 이사회의 만장일치로 정명훈이 오는 2027년부터 3년간 음악감독 직을 맡게 됐다고 밝혔다. 취임연주회는 2026년 12월 7일이다.
베르디의 ‘나부코’, 푸치니의 ‘나비부인’과 ‘투란도트’ 등 오페라 명작들이 초연한 이 곳에 정명훈이 음악감독으로 결정되자, 세계 클래식계는 금세 떠들썩해졌다. 클래식 전문 사이트 ‘바흐트랙’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라고 했고, 영국 클래식 음악계의 독설가인 평론가 노먼 레브레히트도 “충격적인 선택”이라고 했다. 라 스칼라는 그간 저명한 지휘자들이 거쳤으나, 지금까지 비(非) 이탈리아인은 다니엘 바렌보임이 유일하다. 게다가 중도 우파 성향의 조르자 멜로니 정부가 들어서며 이탈리아에서도 외국인보단 자국인을 선호했다. 최근 보수 진영 정부가 들어선 유럽 여러 나라의 분위기와 다르지 앉다. 정명훈은 라스칼라 최초의 동양인 음악감독이다.
음악감독 선임 이후 개관을 앞둔 부산콘서트홀에서 한국 기자들과 먼저 만난 정명훈은 “여덟 살에 건너가 외국에서 일평생 생활해 왔기에 ‘아시아인 최초’라는 말이 내게 특별히 의미있는 일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다만 “외국인은 다른 나라에 가면 그 나라 사람보다도 잘해야 한다고 생각으로 열심히 해왔다. 나라를 빛낼 기회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정명훈은 그간 공식석상에서 특정 단체의 책임을 맡는 자리(음악감독)엔 가지 않을 것이라고 공공연히 밝혀왔다. 2015년 라디오 프랑스필 오케스트라를 떠날 당시부터 60대 이후엔 오케스트라나 극장 등을 책임지는 자리는 맡지 않겠다는 했다.
그는 “인생은 타이밍이다. 오래 살다 보면 자신이 원하는 대로 될 수 없는 것이 있다”고 했다. 1989년 프랑스 파리오페라바스티유를 맡았을 당시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불어도 못하고, 경험두 부족하고 너무 젊어 이건 좀 이상한 일이라 생각했다”고 돌아봤다.
이번 ‘라 스칼라’의 음악감독 선임에 대해서도 그는 “살다 보면 일이 묘하게 돌아갈 때가 있는데 이번 일이 그렇다”고 했다. 2년 뒤 극장 취임시 그의 나이는 70대 중반으로 향한다.
정명훈은 ‘라스칼라’를 거절할 수 없었던 이유로 ‘좋은 동료들’을 꼽았다. 포르투나토 오르톰비나 라 스칼라 극장 대표는 정명훈과 오랜 인연을 맺으며 “가장 편하게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사람으로 캐스팅부터 리허설까지 모든 책임을 맡아줘 음악에만 전념할 수 있게 해준다”고 했다.
단원들도 특별하다. 보통의 오케스트라에선 예술가이기 전 직장인인 단원들은 출퇴근 시간은 물론 근무시간을 철저히 지키는 것으로 유명하다. 특히 외국 오케스트라에선 “시간이 돈”이라는 입장이 분명하다고 정 감독은 설명한다. 라 스칼라 단원들은 그러나 하루에 두 번 하는 리허설을 세 번까지 이어가며 음악에 열정을 보인다고 한다.
정 감독은 “이젠 아무리 잘하는 악단이라 해도 서로 통하는 것이 없고,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 없다면 함께 하기가 싫어진다”며 “라스칼라는 지금까지 나의 제일 좋은 친구들이었는데, 이젠 가족으로의 책임도 안게 됐다”고 말했다.
정명훈과 라스칼라의 관계는 각별하다. 라 스칼라에 따르면 정명훈은 1989년부터 총 9편의 오페라를 84회 공연했고, 총 140회가 넘는 콘서트를 지휘했다. 비음악감독으로는 가장 많은 숫자다. 라 스칼라는 정명훈을 “베르디의 대표적인 해석가”라고 했다. 취임 연주회에서도 그는 베르디의 ‘오텔로’를 올릴 예정이다. 베르디가 1887년 작곡해 라스칼라에서 초연한 작품이다. 정명훈이 1993년 파리 바스티유 오페라를 이끌 당시 플라시도 도밍고와 함께 녹음한 음반은 지금도 회자되고 있다.
정 감독은 “천재이면서 인간성까지 좋기는 어렵지만, 베르디는 둘 다 갖춘 사람”이라며 “오페라 ‘시몬 보카네그라’와 같은 작품은 위대한 인물은 따뜻함과 관대함을 지녀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했다. 정 감독은 앞서 2016년 러시아 볼쇼이 극장에서 베르디의 ‘시몬 보카네그라’를 지휘하며 라 스칼라 극장의 해외 오페라 투어를 지휘했다. 그는 “가장 사랑하는 작곡가가 베르디다. 라 스칼라에서도 많이 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음악 인생 내내 전성기를 살아온 그는 고희를 넘어 다시 한번 큰 책임을 안고 새로운 도전을 하게 됐다. 정명훈은 “파리 오페라 시절엔 젊은 에너지 덕분에 하루 24시간씩 일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파리오패라 시절과는 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도 “그럴지라도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일, 라스칼라 음악가들을 도울 수 있는 만큼 돕고 싶다”는 했다.
정 감독은 스스로를 “그 어떤 이탈리아 사람보다 이탈리아를 더 사랑하고, 이탈리아 사람보다 토마토를 더 많이 먹는 사람”이라며 “한국과 이탈리아는 나라의 모습, 감정을 표현하는 법, 노래를 사랑하는 마음 등 많은 점이 닮았다”고 말한다.
그와 이탈리아의 인연은 1975년 시작됐다. 지휘자 프랑코 페라라에게 지휘를 배우기 위해 이탈리아 시에나를 찾았던 것이 첫 방문이다. 페라라는 리카르토 무디를 키운 ‘지휘 스승’이다. 그는 당시를 떠올리며 “50년 전 처음으로 맛본 이탈리아 파스타에 빠져 음악 못지않게 음식까지 사랑하게 됐다”고 한다.
지금은 프랑스 프로방스에 있는 자택에선 올리브 나무를 키우며 열매로는 일 년에 1000병의 올리브유를 만들고, 나무로는 지휘봉을 만들어 무대에 오른다. “올리브 나무 지휘봉은 지금도 사용하는데 잘 부러진다는 단점이 있다”는 그는 “요즘엔 아몬드 나무로도 만든다”고 했다. 사포로 쓱쓱 갈아 만드는 지휘봉은 2~3일이면 하나가 완성된다. 그에겐 이탈리아 음식에 빠지지 않는 ‘올리브 나무’가 아낌없이 주는 나무인 셈이다.
라 스칼라 취임에 앞서 부산콜서트홀과 부산오페라하우스를 총괄하는 클래식부산의 예술감독직을 먼저 시작한다. 오는 9월엔 라 스칼라 필하모닉이 부산과 서울에서 공연한다. 부산오페라하우스는 2027년 개관을 앞둔 만큼 두 극장 간의 협업도 기대된다.
정명훈은 “(두 극장의 협업이) 많이 도움은 될 것”이라며 “(부산오페라하우스는) 처음 시작하는 곳인데, (라 스칼라는) 제일 높은 수준을 보여줄 수 있는 곳이어서 영향을 많이 받을 것”이라고 했다. 라스칼라와 함께 할 베르디 오페라 ‘오텔로’ 역시 부산오페라하우스에서 연주할 가능성이 높다.
정 감독은 “부산에서의 역할이 라스칼라와는 다르다. 무엇보다 (부산에선) 청중을 키워야 하고, 이를 위해 좋은 씨를 심어야 한다”며 “오케스트라에서 일은 음악가가 하지만, 그들의 좋은 연주를 망칠 수 있는 단 한 사람이 바로 지휘자다. 지휘자의 방향성이 성패를 좌우한다. 일평생 통해 배워온 것들이 도움이 될 것”이라고 했다. 뿐만 아니라 “이탈리아 오페라에 관해선 아시아에서 부산이 대표적인 오페라하우스가 되길 바란다”고 했다.
세계 굴지의 오페라 극장의 음악감독으로 취임하며 그는 계약 기간, 공연 횟수, 연봉 등 모든 조건에 대해 라스칼라 측에 맡겼다. 그만큼 믿고 의지하는 사이인 데다 “돈에 대해선 아무 것도 모르기 때문”이라고 했다. 세계적인 극장에서 다시 한번 ‘최초’의 역사를 썼지만, 그는 거창한 목표 같은 것은 없다고 했다. “사랑하는 베르디를 어떻게 해서라도 잘 연주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그런 이유로 지금도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는다. 또 다른 소망도 있다.
“누군가 제게 우리나라의 이미지와 모든 것을 마음대로 정의해도 된다고 한다면, ‘한국은 노래를 사랑하는 나라’라고 말하고 싶어요. 한국인은 어떤 사람이냐고 물을 때 ‘노래를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는 답이 나온다면 정말 행복할 것 같고요. 함께 노래를 하면 싸우기가 힘들어요. 전 우리나라가 어떤 면에선 덜 날카로워졌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사람들이 노래를 더 많이 하는 데에 라스칼라가 도움이 된다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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