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석사와 대승사

"소백산 기슭 부석사의 한낮, 스님도 마을 사람도 인기척이 끊어진 마당에는 오색낙엽이 그림처럼 깔려 초겨울 안개비에 촉촉이 젖고 있다. 무량수전, 안양문, 조사당, 응향각들이 마치 그리움에 지친 듯 해쓱한 얼굴로 나를 반기고, 호젓하고도 스산스러운 희한한 아름다움은 말로 표현하기가 어렵다. 나는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사무치는 고마움으로 이 아름다움의 뜻을 몇번이고 자문자답했다."
나는 부석사를 소개한 글 중에 가장 멋지고 아름다운 문장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수려한 문장을 비유하지 않더라도 부석사는 굳이 따로 설명이 필요 없는 사찰이다.
이곳에서 직선 거리상 약 50km 정도 떨어진 문경의 대승사는 부석사보다 국가유산으로 지정된 문화유산이 1점 적긴 하지만 창건 연도는 89년이 앞선 587년(진평왕 9)에 건립된 전통 명찰이다. 경북 북부 지역에서는 상당히 이른 시기에 창건된 사찰이다. 비록 대승사는 부석사처럼 아름다운 문장으로 기록 되지는 못했지만 마치 설화 같은 창건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죽령 동쪽 100리에 우뚝 솟은 산이 있는데, 진평왕 9년(587) 갑자기 4면이 한 장(丈)이나 되는 돌이 하늘에서 산꼭대기로 떨어졌다. 그 돌에는 사방여래(四方如來)가 새겨졌는데, 붉은 비단으로 싸여 있었다. 왕이 이 말을 듣고 행차하여 절을 하고는 바위 곁에 사찰을 창건하도록 했다. 절 이름을 대승사(大乘寺)라 했는데, 법화경을 외는 비구 망명(亡名)을 주지로 삼아 바위를 깨끗이 쓸고 향불이 끊어지지 않게 했다. 산 이름은 역덕산(亦德山)이라고도 하고 사불산(四佛山)이라고도 한다. 승려가 죽어 장사 지냈는데 무덤 위에 연꽃이 피어났다"
일연스님이 쓴『삼국유사』의'사불산(四佛山)·굴불산(掘佛山)·만불산(萬佛山)'조에 나오는 이야기다. 과연 신라 진평왕이 하늘에서 내려온 동서남북 사면으로 새겨진 부처님을 보자고 왕궁까지 비우고 한 달이라는 시간을 투자해서 문경까지 왔을까? 조금 의문은 드는 내용이지만 기록이니 신빙성에 무게를 두고 생각할 필요는 있겠다. 망명(亡名)은 글자 그대로 이름이 잊혀져 알 수 없게 된 승려다. 한 장(丈)이란 한 자(尺)의 열 배에 이르는 단위다.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을 줄인 법화경은 대승불교의 대표적 경전이다. 모든 중생으로 하여금 부처의 경지에 들어서게 하는 데 근본 목적을 둔다. 사방여래가 새겨진 바위가 떨어졌다는 것은 주변 고을 사람들을 극락정토로 한데 이끌고 가겠다는 부처의 뜻이 아닐 수 없다.
이 정도면 부석사와 대승사가 어떤 역사성을 간직한 사찰인지는 대략 파악했으리라 본다. 그렇다면 두 사찰 간에 있었던 소송사건으로 들어가 보자.
현재 대승사 대웅전에는 국보로 지정된 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이하 목각탱화:木刻幀畵)이 있다. 나무를 재질로 한 목각탱화는 전국에 모두 6점이 남아 있는데. 예천 용문사와 상주 남장사의 보광전과 관음선원에 각각 1점이 있으며, 남원 실상사, 서울 경국사에 있다. 이 가운데 가장 먼저 만들어지고 가장 크고 수려하게 만들어진 목각탱화는 대승사 대웅전에 모셔져 있다. 대부분 경북 북부 지역에 분포하고 있고 대체로 17세기에서 18세기 사이에 집중되어 제작되었다.
그런데 대승사 대웅전에 모셔져 있는 목각탱화는 아이러니하게도 영주 부석사에서 1675년(숙종 1)에 제작된 불화이다. 이후 1862년(철종 13) 대승사에 큰불이 나면서 대웅전이 전소 되었다. 곧바로 복구가 시작되었으나 법당에 모실 부처님을 조성하지 못하다가 7년 뒤인 1869년 봄에 대승사로 모시게 되었다. 당시 부석사에는 40여 년 전에 퇴락한 금색전의 목각탱화가 무량수전 뒤편에 옮겨져 있던 상태였다.
당시 목각탱화를 이운하기 위한 정상적인 행정 절차 후 무량수전 건물 뒤에 있던 목각탱화는 대승사로 옮겨져 봉안되었으나, 7년 뒤인 1875년에 부석사에서 목각탱화를 되돌려 받기 위한 등장(等狀:여러 사람이 이름을 잇대어 써서 관청에 올려 하소연 하는 일)을 올리면서 소송이 다시 시작되었다. 두 번째 소송은 1875년 4월에 부석사에서 순흥부에 올린 2건과 12월 천주사 도총섭에게 올린 등장 1건, 그리고 1876년 1월 대승사에서 천주사와 관찰사에게 올린 등장 2건 순으로 진행되었다.
1875년 4월 부석사에서는 절이 쇠락한 틈을 타 대승사에서 목각탱화를 억지로 빼앗고 목각탱화 옆에 있던 세 불상과 절집 물건을 훼손한 내용을 명분 삼아 순흥부에 등장을 올렸다. 새로 온 순흥부사는 사찰 간에 일어난 도불사건에 주목하며 대승사에서 목각탱화를 되찾아오는 것을 허락하지만 진전 없이 답보 상태에 머물렀으며, 12월에 올린 등장에는 순흥부 사 대신 천주사 총섭이 목각탱화 반환을 답하기도 하였다. 이에 대승사 역시 불제자의 도리로서 불상을 옮기는 절집의 관례, 목각탱화 이안을 순흥부가 허락한 일, '상기'라는 승려가 목각탱화 이안에 관한 재물 요구, 도불에 대한 억울함 등을 들어 천주사 총섭과 관찰사에게 등장을 올린다. 이에 관찰사는 부석사의 무고로 판결을 내면서 두 번째 소송이 정리되었다.
1869년부터 1876년 사이에 일어난 두 차례에 걸친 대승사와 부석사의 소송은 1876년 3월에 마무리가 된다. 완의(完議:충분히 의논하여 참석자 전원이 합의한 내용)에는 목각탱화 봉안에 대한 두 사찰 간의 합의 내용이 담겨 있다. 부석사는 목각탱화를 대승사에 봉안하는 것을 허락하고 대승사는 이에 대한 답례로 부석사 의상대사를 모신 조사전의 수리 비용 250냥을 부조하는 것으로 두 사찰 간의 분쟁은 끝을 맺는다.
우리나라 역사상 대웅전 후불탱화를 두고 사찰 간에 법적인 분쟁을 일으킨 사건은 사실상 유일하다 할 수 있다. 물론 다툼이야 있을 수 있었겠지만, 관아에서 민원을 접수하여 무려 7년간의 세월 동안 소송이 진행된 예는 없었다고 봐야 한다.
만약 이때 결론이 나질 않았으면 지금까지도 대승사와 부석사간의 논쟁의 불씨가 남아 있을 수가 있을 것이다. 비록 조선시대에 일어난 사건이지만 현대 시대에도 쉽게 풀지 못할 일을 슬기롭게 잘 마무리가 된 소송사건이라 할 수 있다.
엄원식 문경문화예술회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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