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영오 칼럼] 책임지지 않는 권력
법원이 제1·2당 대선 후보 결정할 뻔
선출 안된 권력의 선거 영향력 커지면
정부 권위 좀먹는 음모론 확산 못 막아

사법부가 음모론의 주역이 된 것은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5부(재판장 지귀연)가 윤석열 전 대통령의 구속 취소 청구를 받아들인 지난 3월 7일이다. 법원은 사상 처음으로 ‘구속 기간 시간 계산’을 적용하고, 검찰은 윤 대통령이 풀려나자 다시 ‘구속 기간 날짜 계산’으로 되돌리는 ‘법 기술’을 보여줬다. 윤 대통령을 석방하고 나아가 내란죄 혐의도 벗어나게 하기 위해 법원과 검찰이 ‘누군가’의 지휘를 받는 것 아니냐는 의구심이 설득력을 얻게 되면서부터 음모론은 날개를 달기 시작했다.
이 음모론은 지난 1일 대법원이 이재명 후보 공직선거법 위반 사건 2심 무죄 판결을 파기 환송하고, 대통령 선거에 나서지 못하게 하려는 듯한 자세를 취하면서 증폭됐다. 그 정점은 지난 주말 국민의힘 대선 후보 교체 막장극이었다. 국민의힘 경선에서 승리한 김문수 후보가 한덕수 전 총리와 단일화에 대해 말을 바꾸자, 한 전 총리와 ‘쌍권’으로 대표되는 당 지도부는 각본이 있는 것처럼 호흡을 맞췄다. 한 전 총리는 마치 국민의힘 후보 자리를 보장받은 듯이 행동했고, 지도부도 이를 실현하기 위해 무리수를 거듭했다. 결정적 순간, 이번엔 서울남부지법이 당 지도부의 손을 들어주며, 결과적으로 정당한 절차를 거쳐 당선된 후보 자격을 박탈할 길을 열어준다.
‘넛지 이론’으로 유명한 캐스 선스타인 미 하버드대 교수는 음모론을 “권력자들이 몰래 어떤 악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공모하고 있다는 믿음”이라고 정의한다. 하지만 실제 사회에서는 권력자가 생각보다 전지전능하지 않고, 권력자들의 공모도 쉬운 일이 아니다. 여러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는 국가 규모의 사회에서는 더 그렇다. 사회현상은 개별 행위자들의 의도가 서로 부딪치며 그 누구도 의도치 않은 결과를 만들어내는 경우가 많은데, 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권력자 집단 공모의 결과’로 믿는 데서 음모론이 자라난다.
하지만 아무리 규모가 큰 사회라도 그 사회 권력 엘리트 구성원들이 동질적이고 네트워크가 잘 짜여 있다면, 음모론의 정확도가 높아진다. 개별 권력자가 전지전능하지 않더라도 권력자 집단이 폐쇄적이고 구성원 간 이해가 일치하는 경우가 많아질수록 점점 더 제멋대로 권력을 행사하게 된다. 특히 우리 사회는 법원, 군, 검찰, 경찰 등 공권력 담당 주요 기관의 지휘부가 같은 학교 출신 비중이 매우 높게 구성돼 있어 그 위험성이 크다. 물론 권력 엘리트 폐쇄성이 학벌만으로 형성되지는 않는다. 그래도 잘 이해되지 않는 정치적 사건을 분석할 때 주요 관여자들의 출생지와 출신 학교부터 따지는 것이 상식인 점은 현실이다.
1990년대 네덜란드 저널리스트 카럴 판볼페런은 일본 정치 구조의 핵심적 문제를 ‘책임지는 중앙 권력의 부재’라고 지적해 일본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문제가 생기면 총리만 갈아치우는 데 그칠 뿐, 문제 근원인 관료·법조 집단과 집권당 파벌은 아무 책임도 지지 않고 유지되는 일본 권력구조의 특징을 제대로 찔렀기 때문이다.
법원이 마음만 먹으면 제1·2정당 대선 후보의 선거 출마를 막을 수도 있다는 것을 목격하면서 많은 국민이 충격을 받았다. 일각에서는 선거 기간 재판을 중단해 유권자에게 진실을 알리지 않는 것이 ‘선거 개입’이라고 주장한다. 이것이 소송기록도 제대로 검토하지 못한 채 서둘러 판결을 내려, 지지율 1위 후보 자격을 박탈하는 것보다 더 심각한 선거 개입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오랜 기간 사법부가 금기로 여기던 ‘정치 관여 자제’ 원칙이 흔들리는 이유를 책임지지 않는 권력 집단 내 공모에서 찾으려는 음모론이 힘을 얻고 있다. 한국의 권력 집단은 판볼페런이 지적한 일본의 권력 집단과 점점 닮아가고 있다. 뿌리가 더 깊어지기 전에 대책을 세워야 한다.
정영오 논설위원 young5@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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